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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7. 1. 17. 23:30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






    두룡포기사비 비문(頭龍浦記事碑 碑文)

     

    두룡포에 진영을 설치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선조때 통제사 이경준이 처음으로 세웠다.

    그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고 또 진영을 설치하여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로움을 잊지 않고 그 덕을 생각하여 돌에 그의 업적을 새겨 전하고저 하였다.

    그래서 현재의 통제사 구공에게 하소연하였다.

    구공은 일찍이 공의 보좌관으로 있을 때 공에게 신임을 받고 또한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그 기록을 빛내고자 나에게 비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는 지라,

    나는 감히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양 할 수가 없어서 그 대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공원 옛날 정승을 지냈던 증()의 아들이며 한산 목은공의 후손이다.

    가문이 흥성하여 세상에 전해진 덕의 무성함이 나라의 역사에 올려져 있고

    묘비에도 새겨져 있으므로 이 비문에서는 대략을 줄이려고 한다.

     

    공의 형제는 다섯 분인데 함께 나란히 세상에 드러났다. 첫째는 경홍이요,

    둘째는 참판 경함이니 쌓은 덕과 높은 명망이 당대 제일이며, 셋째는 곧 공으로 경심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좌랑을 지낸 경류인데 임진란에 죽어 나라일을 뜻대로 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재수를 헤어라지 못하겠으며,

    다섯째는 현제 소윤인 경황인데 비록 과거를 거친 관직에 나가지는 아니했지만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여 여러번 내직과 외직으로 옮겨 다니며 벼슬을 하여 기름을 드러내고 있다.

     

    공은 비록 무예로써 몸을 일으켰으나 경서와 사기에 두루 통하였고 시와 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온화한 용모에서는 옛 선비나 장수의 기풍이 있어, 평안절도사를 두 번 지냈고 황해절도사를 두 번 지냈으며

    충청병사를 한 번 지냈다. 병사와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공경하였고 그를 신명과 같이 위엄있게 느꼈다.

    그가 다스리는 지경은 늘 평안하고 무사하였으며, 그의 어짐과 위엄과 일을 처리해 나가는 솜씨는 다른 사람들 보다 월등히 뛰어났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조정에서 거듭 나라의 요새지를 맡겨 두 번이나 통제사를 삼았다.

    통제사란 직책은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지키는 것으로

    병권을 맡은 귀한 자리이고 무거운 소임이어서 당대의 으뜸이 아니면 능히 맡지 못하는 직책이다.

    그러나 통제사를 두게 된 것은 또한 오래되지 않았다.

    임진란 때 이순신이 바다 위에서 적은 병사로 큰 적을 무찔러 적의 수륙병진작전을 좌절시켜

    큰 공을 세웠으므로 조정은 관직으로서 그에게 상 중 만한 것이 없었고,

    또 중요한 권한을 주지 않으면 병사들을 통솔하여 나라를 방어하기 어려우므로 특별히 통제사라는 관직을 만들어 그에게 내려 주었다.

     

    통제영은 처음에 한산섬에 있었는데,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멀어서 중간에 고성으로 옮겼으나

    배를 숨기는 데는 편했어도 갑자기 당하는 변을 막는 데는 불편하였다.

    통제사로 오는 사람들이 우선 편한 것만 생각하여 능히 고치지 않고 두었는데

    공이 통제사가 되어 미처 개연히 마땅한 땅을 측정하여 진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되었다.

    서쪽으로는 판데목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을 끌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큰 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있어서,

    깊어도 구석지지 않고 앝아도 드러나지 않아 진실로 수륙의 형세가 국방의 요충지였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도적들이 감히 이 곳을 지나가지 못하였으므로 난이 끝나 바다가 잔잔해진 것이 수십년이 넘었다.

     

    옛날 조적이 초성에 진영을 옮기니 후조가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유익이 면구에 진영을 옴기니 북로가 지리의 험난함을 살쳐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비록 천연의 요새라 할 지라도 사람을 만나야만 비로소 국방의 요충이 되는 것은 예나 이제나 같은 것이다.

    두룡포가 옮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한낱 소금기가 많아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바닷가 항구로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잡초 우거진 언덕으로 몇 천만년 동안 몇 천 백의 사람들을 겪어 오다가

    비로소 공의 손을 빌어서야 이루어 졌다.

    하늘이 이 요새를 설치하고서 때를 기다리고 또 사람을 기다린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충무공이 앞서 적을 파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킨 때를 맞추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런데 유독 공의 행적만이 거의 허물어져 전하여 지는 것이 없는가?

    어찌 현명한 자손이 능히 집안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 두룡의 험한 땅이 공을 만나 국방의 요새지가 되었고,

    공의 공적과 덕이 또한 구공을 만나서 비속에 새져 전하게 되었으니.

    단지 땅만이 사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사람도 또한 사람을 기다린 것이니, 이 또한 어찌 우연이겠는가.

    구공은 본디 중신의 친척으로 이 진영을 맡게 되니, 그 공명과 사적은 공이 현재 통제사로 있고

    또 이러한 일들을 주관하였으므로 감히 찬사를 드리지 않기로 하고 뒷사람이 논하기를 기다리노라.

     

    통훈대부 창원대도부사 박홍미 지음

    어모장군 행훈 □□□□□ □□□ □


    천계 5년(1625년) 3월


    고종 갑진년(1904년)에 본군 사람 이학재, 이승재가 바닷가로부터 세병관 광장에 옮겨 세웠다.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2호(1974.12.28 지정)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설치한 제6, 9대 이경준(李慶濬) 통제사의 치적을 기록한

    '이경준사적비'로 인조 3(1625)에 제19, 25대 구인후(具仁垕) 통제사가 세웠다.
    두룡포는 원래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경준이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옴으로써 전략적인 요충지가 되었다.

    이 비석은 받침대 없이 비신(碑身)과 머릿돌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비문은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의 부사(府使)였던 박홍미(朴弘美)가 지었다.

    비문은 아랫부분이 마멸되면서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그 내용은 확인된다.

    비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함께 통제사 이경준의 약력(略歷)과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하늘을 오르며 하나의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이 비석은 원래 통제영의 영문(營門) 자리에 세웠던 것을 190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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