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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의사상(李奉昌義士像)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7. 1. 4. 21:51
이봉창의사상(李奉昌義士像)
이봉창 의사(李奉昌 義士, 1900~1932)
이봉창의사는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효녕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李鎭奎)씨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게 되었고,
자리를 옮겨 남만(南滿)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을 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참을 수 없는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여기서 이봉창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한 그는 철도원 생활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어(日語)를 익히는 한편,
상점점원이나 철공소직공·잡부역·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인생활을 익혔다.
이렇게 6년여의 ‘일본습득(日本習得)’을 마친 후 독립운동 본거지인 상해로 옮겨왔다.
능숙한 일어를 바탕으로 일인상점에 취직, 임시정부청사와 거류민단 출입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인식 이름을 쓰는 한국인을 의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같은 사실은 백범에게 전해졌고 임시정부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를 시켜 면밀히 관찰하게 하였다.
이봉창이 단순한「건달」이 아님을 간파한 백범은 여러차례 비밀리에 면담을 갖고
이 과정에서 김구는 이봉창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아 신임하게 된다.
이후, 김구선생과 이봉창 의사는 1년여의 준비 기간동안 폭탄준비, 여비 마련을 하여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마침내, 김구선생은 중국 공병창에서 폭탄 1개와 하남성 유치(劉峙)에게서 얻어 온 폭탄 1개를 구하였다.
한 개는 일본국왕의 처단용이었고, 하나는 이봉창의 자결용이었던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김구 선생은 1931년 12월 6일 프랑스 조계의 임시정부판공서에서 개최된
국무원회의에 이 거사 준비계획을 정식 상정하였다.
12월 12일, 프랑스 조계 중흥여사(中興旅舍)로 이봉창의사를 초치하고, 마지막 거사 계획을 완료하였다.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에 입단을 하고 선서문을 낭독하였다.
수류탄 2개와 거사금을 건네 받은 의사는 안중근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자택에서 역사적인 기념식을 마치게 되었다.
일인으로 가장하고 12월말 일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본국왕이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해의 백범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전보를 보냈다.
예정대로 수류탄은 일왕에게 던져졌으나 불행히도 명중되지 못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만 뒤집어 놓았다.의사는 현장에서 피체되어 동경의 인고쿠(印谷)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의사는 형무소에 수감된지 9개월이 지난 10월경,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에서는 이봉창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의사의 의거를 동경폭탄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전세계에 공표하였다.
비록, 일왕의 처단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라도 의사의 그 의거는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이어졌고,
한·중협력의 새로운 관계를 통한 독립운동 진작에 큰 활력소가 되게 한 커다란 의열투쟁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의 유해는 1946년 7월 고국으로 모셔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선서문(宣誓文)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祖國)의 독립(獨立)과 자유(自由)를 회복(回復)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一員)이 되야 적국(敵國)의 수괴(首魁)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盟誓)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20일한인애국단 앞, 선서인 이봉창
* 이봉창 선생은 1931년 1월 중국 상해에서 김구(金九) 선생의 주선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뒤
그해 12월 13일 태극기를 배경으로 가슴에 이 선서문을 단채 수류탄을 들고 일왕 폭살 결의를 다졌다.
건립문(建立文)
나라가 일제(日帝)에 의해 강점(强占)되었을 때 조국 광복을 위하여 몸을 바친
이봉창 의사(李奉昌 義士)의 드높은 민족혼(民族魂)과 독립정신(獨立精神)은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불타고 있다.
의사는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의사는 원흉인 일왕(日王) 히로히토(裕仁)를 폭살 제거하는 일이
바로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전 세계에 고발하고 응징하여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라 믿고
상해(上海)로 건너가 김구(金九) 선생과 거사(擧事)를 자청, 허락을 받았다.
1932년 1월 8일 도쿄(東京)에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목숨을 빼앗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당해 32세의 나이에 순국(殉國)하였다.
의사의 위대한 애국사상과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광복 50주년과 의거 및 순국 63주년을 맞이하여 여기 동상을 세운다.
1995년 11월 6일
이봉창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김재홍
이봉창의사 동상건립위원회 회장 김병관
후원 동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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