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이승훈(李承勳, 1756~1801) 베드로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6. 11. 11. 04:57

    이승훈(李承勳, 1756~1801) 베드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순교성지에서






    이승훈(李承勳, 1756~1801) - 본명: 베드로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아버지는 참판(參判) 동욱(東郁)으로 남인(南人)이다.

    외조부 이용휴(李用休)와 외삼촌 이가환(李家煥)의 영향을 받았고,

    기호남인(畿湖南人)의 젊은 재사인 권일신(權日身정약종(丁若鍾정약전(丁若銓이기경(李基慶)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권철신(權哲身)을 중심으로 한 성호좌파(星湖左派)의 학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서양의 신학문에 대한 수용 열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1775년 정약용(丁若鏞)의 누이와 결혼했다.

    1780(정조 4)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갈 때,

    천주교에 몸담고 있던 친척 이벽(李檗)의 부탁을 받고 서학(西學) 서적을 구하기 위해 베이징[北京] 북천주당(北天主堂)에 찾아갔다.

    거기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교리를 연구한 후 입교할 것을 결심,

    이듬해 예수회의 루이 그라몽(染棟材, Louis de Grammont)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었다.

    17843월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성화·묵주 등을 갖고 귀국하여

    이벽·최인길(崔仁吉)과 함께 권일신, 정약용 형제 등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하면서 영세를 집전했다.

    다음해 명례동(明禮洞)의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 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했다.

    이들은 정기적인 신앙모임을 갖고 교리서를 언문으로 번역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자,

    이승훈은 가족들의 권유로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척사문(斥邪文)을 짓고 배교했다.

    1787년 비밀리에 복교하여 자치적인 교회활동을 개시하여 권일신을 주교로 하고 스스로는 신부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했다.

    178910월 윤유일(尹有一)을 베이징으로 파견하여 자치적 교회의 존재를 알리게 하고

    조상 제사에 대한 교리 해석과 성직자 파견을 부탁하게 했다.

    그러나 베이징 교구장 알렉상드르 구베아(湯士選) 신부로부터 조상 제사의 불가 통보와 자치교회의 부정 회답을 받고 다시 배교를 했다.

    1791년 평택현감으로 재직중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제사 거부로 비롯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이기경을 비롯한 유생들의 상소로 관직을 빼앗기고 투옥, 옥중에서 배교를 하여 석방되었다.

    1794년 중국에서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입국하여 전도활동을 하자 교회와 다시 접촉했으나,

    다음해 윤유일·최인길·지황(池璜) 등이 체포·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 예산(禮山)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생활중 유혹문 牖惑文을 지어 유포하고 1796년 유배가 풀린 후

    주자백록동연의 朱子白鹿洞衍義를 짓는 등 교회활동을 단절한 입장을 밝혔다.

    1793년 이후 기호남인들은 정치적으로는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한 채당(蔡黨)

    그에 반대하는 홍당(洪黨)으로, 천주교에 대한 입장에서는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로 나누어졌다.

    채당 신서파에 속한 그는 반대파에 속한 홍낙안(洪樂安이기경 등에게 계속 공격을 받았다.

    1801년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貞純王后)와 심환지(沈煥之) 등 벽파세력 및 최헌중(崔獻重)

    남인의 일부 세력은 남인 시파가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계기로

    사학탄압(邪學彈壓)을 내세우면서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에 이가환·정약용·권철신·정약종·정약전 등과 함께 연루되어

    같은 해 226일 정약종·최창현(崔昌賢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과 함께

    '구서전법'(購書傳法)·'밀통양인'(密通洋人)·'잠모가환'(潛謀家煥)의 죄목으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했다.

    1856년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는 신원되었다. 이후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1866년에,

    증손 연구(蓮龜균구(筠龜)1871년에 순교하여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가 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