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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저수지와 광교공원수원사랑/휴식공간 2017. 3. 6. 05:19
광교저수지와 광교공원
수원 상광교동 정선생의 지혜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학역제(學易齊) 정인지(鄭麟趾)는
태종 및 세종에게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학문적 능력이 탁월하였던 사람이었다.
특히 성삼문. 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에도 그 공이 지대하였으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
수원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수원천의 발원지 광교산 아래 하동 정씨
정인지(鄭麟趾)선생의 후손이라고 하는 정선생이란 분의 이야기가 전한다.
명문집안의 후손답게 정선생은 학식이나 도량(度量)과 기지(奇智)가 뛰어나
인근 사람들은 이분을 이인(異人)이라고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선생께서는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인근의 사람들은 모든 일을 정선생님께 의논하고 결정하였다 한다.
수원시 하광교동(下光敎洞)에 홍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초가을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여름내 땀 흘리고 힘들여 가꾼 보람이 있었다.
그러나 추수를 앞둔 무렵이라 쌀이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그래 부족한 양식을 채우기 위해 수수풀떼기죽을 해 먹어야 했다.
종일 베를 짜다 허기가 진 홍씨의 며느리는 수수풀떼기 죽을 급히 먹고는 다시 베틀에 앉았다.
그런데 베를 짜던 홍씨 며느리가 갑작스레 배가 아프다고 펄펄 뛰었다.
집안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윗마을 정선생님께 사람을 보냈다.
정선생은 홍씨 집에서 달려온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듣더니 대뜸 하는 말이,
“관격(급하게 음식을 먹어 체한 증세)이 들었구먼, 그런 때는 베 홑이불에다 여인을 뉘어 놓고
장정 넷이 사방에서 홑이불을 들고 이리저리 굴리라고 하시오.”라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들은 심부름을 갔던 사람은 곧 내려와서 정선생님이 일러준 대로
여인을 베 홑이불에다 누이고, 이리 저리 한참동안을 굴렸다.
그랬더니 과연 홍씨의 며느리는 땀을 쭉 흘리면서 일어났다.
홍씨의 며느리는 급하게 먹다 체한 것이니 먹은 음식이 소화되면 낫는 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일어난 홍씨의 며느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베틀에 올라앉아 베를 짰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으로서는 대단치 않은 이야기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말만 듣고도 왜 병이 생겼으며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지를 알았으니
정선생의 지혜야말로 대단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전하는 바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마을의 어른이요,
학식이 있는 선비가 백성들의 삶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한 정선생의 지혜로움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다음의 이야기 역시 정선생이 얼마나 인간사를 깊이 이해하였으며, 또 얼마나 지혜로운 분이었나를 보여준다.
홍씨네 며느리의 관격소동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있었던 일이라 한다.
수원에 새로 부임해 온 유수가 있었다. 유수의 집은 본래 서울이었지만
수원유수로 부임해 오면서 아버지를 함께 모시고 왔던 것이다.
유수의 아버지는 수원에서 여러 달이 지나면서 이상하게도
병명도 알 수 없는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더니만 급기야 병석에 누었다.
갖은 처방의 약을 써보았지만 유수의 아버지의 병은 더해만 갔다.
유수는 이러저러한 궁리를 하다가 상광교동(上光敎洞)에 훌륭한 분이 계시다 하니 그 분을 빨리 모셔 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정선생은 유수가 보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나더니 종이쪽지에다 ‘귀향(歸鄕)’ 두 자를 써주는 것이었다.
“아니 이것은 약방문 같지도 않은데 무슨 뜻입니까, 자세히 알려 주십시오” 했다.
그러나 정 노인은 별다른 약방문이 필요 없다는 듯이 어서 가라면서,
“내가 가볼 필요도 없네. 이것만 갔다 드리면 아시네.” 하며 오히려 재촉을 했다.
그 쪽지를 급히 가지고 와서 유수에게 보였다. 유수가 보니 ‘귀향’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유수가 혼자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과연 그러했다.
아버지를 잘 봉양하겠다고 낯선 수원땅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온 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수원유수도 아버님의 병환은, 고향이 그립고 친구가 그리워 생긴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급히 아버님이 사시던 서울로 다시 모셔다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서울로 돌아간 유수의 아버지는 얼마 안 되어 병석에서 거뜬히 일어났다고 한다.
두 이야기를 통하여 알 수 있듯, 상광교동(上光敎洞)에 살았다 전하는 정선생은 인간사에 대한 깊은 이해로서
많은 이들이 일상사와 세상살이에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을 명쾌하게 해결한 분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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