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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찾아 온 숙지산(熟知山)수원사랑/숙지산(熟知山) 2017. 4. 8. 20:23
봄이 찾아 온 숙지산(熟知山)
숙지산(熟知山)이란 명칭의 유래를 알아보면, 원래는 ‘죽지산(竹枝山)’이라 했으나,
이를 한자로 된 명칭과는 달리 음성으로 들리는 소리로 듣다보면 ‘죽는다’는 뜻으로 연상이 되어
‘숙지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해지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정조대왕이 팔달산에 올라가서 이 산을 바라보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산이니 숙지산(熟知山)이라고 부르라’고 한데서 숙지산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숙지산이 역사적으로 많은 공헌(화성축성에 공헌)을 했다 함은, '화성성역의궤' 기록 중에서 살펴보면
“돌 캐는 곳(부석소, 浮石所)은 다섯 군데였는데, 이것을 숙지산 2군데, 여기산 2군데 설치하였고 권동에 1군데 설치하였다.
대체로 숙지산 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곱고, 여기산 돌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은 거칠었다.
권동 돌은 여기산 돌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곱고, 팔달산 돌은 숙지산 돌에 비하여 더 강하고 여기산 돌은 팔달산 것보다 더 거칠었다.
화성부 서쪽 5리 떨어진 여기산 2곳과 권동, 서성 터를 닦다 발견한 팔달산 왼쪽 등성이에서부터
남쪽으로 용도에 이르기까지 600보~700보 석맥(石脈) 등 6곳이 발견되었다.
팔달산 것은 숙지산에 비해 강하고 여기산보다 거칠었다.
이 여러 곳에서 떠내 돌을 통들어 계산하면 숙지산(熟知山)돌이 약 81,100여 덩어리, 여기산(如岐山)이 약 62,400여덩어리,
권동(勸洞, 앵봉鶯峰)의 돌이 약 32,000여덩어리, 팔달산(八達山) 돌이 13,900여덩어리 등 모두 189,400덩어리였다.
현재 여기산(麗岐山)은 화성성역의궤에는 여기산(如岐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돌 뜨던 터, 부석소(浮石所)
숙지산(熟知山)은 화성을 축성(1794.1~1796.9)할 때 대부분의 돌을 조달했던 곳이다.
지금도 바위 군데군데에 돌을 자르기 위해 쐐기를 박았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정(釘)을 사용해 돌에 구멍을 판 뒤, 그 속에 물푸레나무나 밤나무 등을 박고 물을 부어 팽창하는 힘으로 돌을 잘라냈다.
숙지산 화성 채석장(熟知山 華城 采石場)
수원시 팔달구 화서2동 산 41번지 화서전철역 부근 옛 전매청 연초제조창(현 KT&G 수원지점)의 건너편
숙지산(熟知山)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으며,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성돌의 채석(采石)이
이루어졌던 유적으로 팔달산과 함께 중요한 성돌의 공급원이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채석된 성돌은 수레를 이용, 치도(治道)를 통해 화성 축성 장소까지 운반되었다.
채석 당시의 쐐기 자국이 여러곳에 남아있어 역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유적이다.
숙지산 화성 채석장은 2006년 12월 26일 수원시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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