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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저항 시인이자 항일문학가, 이상화 고택(李相和 古宅)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4. 28. 05:30

    민족저항 시인이자 항일문학가이상화 고택(李相和 古宅)

     

    민족저항 시인이자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李相和, 1901 ~1943) 시인이 말년(1939~1943)을 보낸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상화고택은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지난 20051027일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대구시는 대지면적 205m², 건축면적 64.5m²(단층 목조주택 2)의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설치를 완료했다.

    이상화 고택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선생의 드높은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 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 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 에는 내 혼자 온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드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마라 옷 자락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넘어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 조차 가뿐 하다.

     

    혼자라도 기쁘게 나가자.

    마른 논은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 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 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 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 조차 빼앗기겠네.

     

     

     

    역천(逆天) / 이상화

     

    이 때야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더구나 그림도 같고 꿈과도 같은 좋은 밤이다.

    초가을 열 나흘 밤 열푸른 유리로 천장을 한 밤

    거기서 달은 마중 왔다. 얼굴을 쳐들고

    별은 기다린다. 눈짓을 한다.

    그리고 실낱 같은 길을 끄으며 바라노라

    이따금 성화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오를 밤에 좋아라 가고프지가 않다.

    아니다 나는 오늘 밤에 좋아라 보고프지도 않다.

     

    이런 때 이런 밤 이 나라까지 복지게 보이는 저 편 하늘을

    햇살이 못 쪼이는 그 땅에 나서

    가슴 밑바닥으로 못웃어 본 나는 선뜻만 보아도

    철모르는 나의 마음 홀아비자식 아비를 따르듯

    불 본 나비가 되어

    꾀이는 얼굴과 같은 달에게로 웃는 이빨 같은 별에게로

    옆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곤두치듯 줄달음질을 쳐서 가더니

     

    그리하야 지금 내가 어데서 무엇 때문에 이것을 하는지

    그것조차 잊고서도 낮이나 밤이나 노닐 것이 두려웁다.

     

    걸림없이 사는 듯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

    아름다운 때가 오면 아름다운 그 때와 어울려

    한 뭉텅이가 못 되어지는 이 살이...

    꿈과도 같고 그림 같고

    어린이 마음 위와 같은 나라가 있어

    아무리 불러도 멋대로 못 가고

    생각조차 못 하게 지쳤을 떠는 이 설움.

    벙어리 같은 이 아픈 설움이

    칡넝쿨같이 몇 날 몇 해나 얽히어 틀어진다.

     

    보아라 오늘 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오늘 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

     

     

     

    이상정 장군(李相定 將軍) 고택(古宅)

     

    1920년경 지은 한옥 골기와집으로 안채, 아래채, 대문채로 구성되었다.

    이상정 장군(1897.6.10~1947.10.27)1916년에서 1945년까지 복무를 하였으며 대한독립군 중장을 역임했다.

    독립유공자로서 일제강점기시인. 서예가. 화가. 조각가로 활동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일명은 이연호(李然皓)

    이상정장군은 이시우의 맏아들이자 시인 이상화(李相和). 사학자 이상백(李相伯). 수렵가 이상오(李相旿)의 맏형()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동경의 국학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오산, 경신, 계성, 신명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에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1938년 김구, 김규식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7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귀국하였고, 귀국 후 40여일만에 뇌일혈로 사망하였으며, 장례는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여성 비행사 1세대중 한분인 독립운동가 권기옥(權基玉) 여사가 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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