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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문묘(文廟)와 성균관(成均館)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7. 22. 05:30

    서울 문묘(文廟)와 성균관(成均館)

     

    성균관의 의미

    고려말과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大學)의 명칭. 학궁(學宮) 또는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주례 周禮에 의하면 '성균'은 오제(五帝)의 학() 가운데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음악(音樂)으로 교육적 성과를 내기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그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균은 음악의 조율(調律)을 맞춘다는 말로서 즉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위치와 연혁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忠烈王) 24(1298)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성균관이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1356)에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서 조선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때의 위치는 개성(開城)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울(漢陽)의 숭교방(崇敎坊 明倫洞)에 있었는데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조선 태조 7(1398) 7월에 교사(校舍)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연도로 삼고 있다.

    태조 당시에는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 및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大成殿, 西廡), 유생(懦生)들이 거처하는 동서재(西齋) 등이 있었다.

    성종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이 세워졌고 현종(顯宗) 때에 비천당(丕闡堂2과거장),

    숙종(肅宗) 때에 계성사(啓聖祠공자 및 五聖奉安)가 증설되었다.

    고종(高宗) 24(1887)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다.

     

    학제

    성균관의 직제는 각 시대별로 많은 변천을 하여 일일이 적을 수는 없으나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따르면 정2품 지사(知事) 1인과 종2품 동()지사 2인은 겸관(兼官)이었다.

    3품 대사성(大司成) 1, 3품 사성 2, 4품 사예(司藝) 3, 5품 직강(直講) 4,

    6품 전적(典籍) 13, 7품 박사(博士) 3, 8품 학정(學正) 3, 학유(學諭) 3,

    9품 학록(學錄) 3인으로 교수직이 조선 초기의 22인에서 38인으로 증원되었다.

    영조(英祖) 때의 속대전 續大典에 의하면 제주(祭酒)가 정3품관으로 설치되어 12품관이 겸직하도록 하였다.

    정조(正祖)때의 태학지 太學志에는 지사(2품에서 정1품까지)를 대제학(大提學)이 겸직토록 하였고, 인원이 더욱 늘어났다.

    입학 자격은 생원(生員)진사(進士)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에게만 한하여 부여되었다.

    이들은 본과생(本科生)이라 하였다. 정원은 시대에 따라 다른데 초기에 200명이었는데 말기 에 100명으로 축소하였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이었으나 50세 장년도 있었으니 연령 제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원진사가 아니더라도 사학(四學)의 생도 가운데서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사서(四書)를 배우고

    오경(五經) 가운데서 1경에 통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능통한 자,

    문과 및 생원진사의 초시(初試漢城鄕試)에 합격한 자, 관리 중에서 입학을 원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였다.

     

    교과과정 및 교수방법

    주요 교과 과정은 사서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밖에 과문(科文)의 제술(製述)도 부과하였고, 제사(諸史)도 독서하였다.

    그러나 노장(老莊)불경(佛經)잡류(雜流)백가자집(百家子集)은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

    교수 방법은 먼저 구재 가운데서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 대학 大學을 배웠다.

    그것을 마친 다음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관원 1명과 대간(臺諫司憲府司諫院)의 관원 각각 1명씩을

    성균관에 파견하여 성균관의 교관과 함께 학생에게 강문(講問)하여 강설(講說)이 자세하고 정확하며

    전체의 뜻을 잘 파악한 자는 논어재(論語齋)에 올리고, 통하지 못한 자는 통할 때까지 대학재에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논어재에서 맹자재(孟子齋)중용재(中庸齋)시재(詩齋)

    서재(書齋)역재(易齋)로 차례차례 진재(進齋)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서 오경에 통한 자는 명부에 기재하고 성균관에 보관하였다가 식년(式年)에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보고하여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하였다.

    이러한 분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제도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시대에 따라서 원칙으로만 지켜지고 적당한 방법으로 교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거의 시험 과목과 방법이 시대에 따라 달라서 경서(經書)와 사장(詞章)의 학습 비중이 이에 맞추어 달라진 것이다.

    교수와 학생사이에 질의응답식의 교수 방식과 개별 지도에 치중하고 교수 1인당 학생이 10인을 넘지 않았다.

     

    유생의 일과와 자치활동

    태학지에는 유생들의 일과 및 지켜야 할 법도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생들은 매월 초 1일 관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4배례(拜禮)를 행한다.

    일과는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안정하게 밝아서 책을 읽는다.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 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마치고 퇴장한다.

    다음에 교수들이 명륜당에 정좌하고 북소리가 나면 입정(入庭)하여 상읍례(相揖禮)하고

    그것이 끝나면 자기 재 앞으로 가서 서로 절하고 인사를 교환한다.

    유생이 교수에게 나아가 일강(日講)을 청하면 상재와 하재에서 각각 1명씩 뽑아 읽는 책을 상대로 강을 행한다.

    북소리가 두 번 나면 모든 유생은 읽는 책을 가지고 사장(師長) 앞에 나아가

    배운 것을 논란(論難)하여 그것을 해결한 다음 새 것을 배운다.

    이 때 많이 배우는 것을 힘쓰지 않고 정밀하게 연찬하는 데에 힘쓴다.

    과목당 독서 기간을 정하고 있는데 대학1개월, 중용2개월, 논어』ㆍ『맹자는 각 4개월,

    시경』ㆍ『서경』ㆍ『춘추는 각 5개월, 주역』ㆍ『예기는 각 7개월로 하였다.

     

    문묘와 교육시설

    조선 초에 완비를 본 성균관의 시설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선조 34(1601)에 재건에 착수하여 6년이 지난 후대 체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 후 말기의 고종 때까지 새로운 시설과 개수 확장 사업을 계속하였다.

    문묘는 공자를 위시한 중국과 한국의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서울의 사학(四學)을 제외한 지방의 향교(鄕校)도 그 내용이 같았다.

    건물의 규모는 96()이다. 문묘에서 향사(享祀)되는 인물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가 달랐고 조선시대에서도 전후기가 다르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와 4(四聖顔子曾子子思子孟子)과 공문십철(孔門十哲),

    그리고 송()나라 6()을 모셨고, 서무(西廡)에는 주()()()()

    송나라 94()와 우리나라 신라고려조선 18위를 봉안하였다.

    해방뒤에 무의 94위는 출향(黜享)하고 우리나라 18위를 대성전에 옮겨서 봉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뒤 명륜당에서 과거를 치루는 알성문과(謁聖文科)도 있었다.

    명륜당은 대성전의 북쪽에 있고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는데 남향으로 18[]이다.

    서재는 각 18칸으로 기숙사이며, 육일각(六一閣)은 유학 교육에서 교양 과목이라 할 수 있는

    육예(六藝) 가운데서 활쏘기[]에 관련된 기구를 보관한 곳이다.

    이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전한 단련도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외 존경각비천당을 비롯하여 진사 식당(進士食堂)정록청(正錄廳)

    향관청양현고(養賢庫) 등 넓은 교육 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특히 양현고는 성균관 학생의 식사와 등유(燈油)돗자리[(鋪席)] 등 여러 가지 교육 기구와

    석전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고려 예종 14(1119)에 안유(安裕)의 건의로 창설한 일종의 장학 기관이다.

    현재에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에서는 양현재(養賢齋)를 그대로 두고 교육과 장학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근대학제로의 변천과 오늘의 성균관

    고종 32(1895) 성균관 관제(館制)를 칙령 제136호로 반포하여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반상(班常)의 구별없이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교육의 기회 균등을 밝혔으며

    시대적 요구와 추세로 인하여 '문명(文明)한 진보(進步)에 주의(注意)함을 요지(要旨)로 함'을 발표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인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고 교육을 일체 중지하여

    국립대학과 민족 교육의 맥을 끊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대신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위하여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犬學)1924년 설립하였다.

    당시 전국의 유림(儒林)이 주권을 지키려는 운동으로 의병활동(義兵活動)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등을 일으키고,

    통문(通文)을 돌려 성균관의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 회복을 선도하자

    그 회유책의 일환으로 1930년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하게 되었다.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진실한 유학 교육과 문화 창달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의 변질된 황도유학(皇道儒學)을 강요하게 되었다.

    교과 과정에 있어서도 국민도덕일어일본사교련 등을 넣어서 그들에 영합하는 교육으로 변모하였다.

    그것마저 1943년 폐교 조치가 되고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말살되었던 유일한 국립대학으로서 민족 교육을 이룩해내었던 전통을 되살리는 운동이 815광복과 더불어 일어났다.

    1945년 명륜전문학교로 문을 열었다가 미군정시대에 명칭을 성균관으로 변경하였고

    1946925일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1953년에는 성균관대학교로 종합대학이 되었다.

    초대 학장 및 총장에는 전통 유림으로서 일제에 대항하였고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취임하였다.

    현재 성균관은 성균관대학교와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전국 234개의 향교와 더불어 유교사상과 전통문화 계승·발전의 산실로서 그 맥을 잇고 있다.

    특히, 매년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청소년 인성교육>을 비롯한 각종 사회봉사 활동,

    예절상담을 통한 생활의례 보급,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출판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신삼문(神三門)

     

    성균관의 정문인 신삼문은 문묘 배향 때만 문을 여닫는다.

    신삼문을 통해 신이 서계를 통해 대성전에 오른다고 하여, 그러므로 왕이라 할지라도

    평상시에 이 문으로 다닐 수 없어 진사식당 앞 하연대에 가마를 내려놓고 동삼문(향문)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하연대(下輦臺)

     

    임금이 성균관을 방문할 때 타고 온 가마를 내려놓더 곳이다.

    하연대 왼쪽의 커다란 동삼문은 임금만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평상시에는 닫혀 있었다.

     

     

     

     

    대성전(大成殿)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으로서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성현 133명의 위패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성전에만 39명의 위패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는 비워져 있다.

    1년에 2회 정기적으로 석전대제를 지낸다. 이 건물과 공간을 통칭해 문묘라 한다.

    대성전 규모는 앞면 5· 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 기법을 느끼게 한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대성전 동서에 있는 동무·서무에는 원래 공자의 70제자와 우리나라 및 중국의 제현(諸賢) 112위를 종향(從享)하였으나,

    광복 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로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나머지 94인의 위패는 묻었다

    선조 3637(16031604)에 세웠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11, 측면 2칸의 크기로 조촐한 납도리 양식의 집이다.

    정문은 정면 3, 측면 2칸의 삼문, 홑처마의 익공집이며 맞배지붕이다.

    건물은 높은 장대석(長臺石) 기단 위에 세워지고 중앙간 및 양협간에도 2짝의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게 되어 있다.

     

     

     

     

     

     

     

    진사식당(進士食堂)

     

    진사식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 식당이다.

    총 33칸 규모의 건물로서 칸을 막지 않고 길게 터서 수 백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구조이다.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유생들에게 시간을 알렸는데, 북을 한 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며, 세 번 치면 진사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였다.

    아침, 저녁 두 끼 식사를 할 때 마다 원점을 하나 씩 찍어주었는데, 이는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는 역할을 하였다.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은 지붕이 높고 앞뒤 폭도 너른 중앙의 강당인 본채와  폭과 높이가 좁고

    낮은 좌우 익실(翼室)이 덧붙여진 솟을집으로 강당은 이익공이며,

    익실은 초익공 구조로 본채와 익실에 명확한 위계를 둔 점이 특징이며

    강당은 마루로 되어 있고, 익실은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을 두었다

    기단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높게 쌓아올렸으며 강당채 앞은 월대를 널찍하게 두어 차별을 두었다.

     

     

     

     

     

    묘정비각(廟庭碑閣)

     

    대성전 앞 뜰에 있는 비각(碑閣)으로서 태종 10(1410)에 문묘를 복건(復建)한 뒤

    변계량(卞季良)에게 문묘의 연혁을 기록하게 하고, 각석(刻石)하여 세웠다.

    비각은 중종 6(1511)에 서향 1()으로 건립되었으나, 선조 25(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러나 인조 4(1626)에 변계량이 썼던 문장을 다시 각석하고, 이정구(李廷龜)에게 명()하여 비음(碑陰)을 기록하게 하고,

    이를 이홍주(李弘胄)가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하여 비각을 복원하였다.

    좁은 비각 안에 묘정비가 들어 있는데 엄청나게 큰 거북이 등에 비를 모시고 있다.

     

     

     

    수복청(守僕廳)

     

    수복청은 문묘(文廟)를 관리하던 남자 종()들이 거처하던 곳으로서

    대성전의 서쪽 담장 밖에 남향, 4()규모로 건립되었다.

    태조 7(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건립되었으나,

    선조 25(1592)에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4(1601)에 중건되었다.

    건물에는 대학당(戴學堂)이라는 현판 걸려 있다.

    건물 규모는 크지는 않지만 규모가 있고 단정해 보이는 건물이다.

     

     

     

    제기고(祭器庫)

     

    제기고(祭器庫)는 각종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보관하던 곳으로 태조 7(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건립되었으며,

    대성전 서쪽에 북향, 6칸 규모의 창고 건물이다.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종묘나 문묘, 기타 전각이 있는 곳에

    제례 때 전사관(典祀官)이 집무하면서 제사 준비를 하는 공간을 말한다.

    문묘 전사청은 석전 때에 희생(犧牲)을 준비하던 곳으로서 성종 3(1472)

    대사성(大司成) 이극기(李克基) 등의 요청에 의하여 대성전 서쪽에 동향, 6() 규모로 건립되었다.

    희생은 제사에 잡아올리는 산짐승 일컫는 말로 아마도 희생을 준비할 공간으로 창고와 비슷한 형태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 비천당(成均館 丕闡堂)

     

    클 비(), 열 천(), 즉 크게 열어 밝힌다는 뜻이다.

    성균관 명륜당의 서북쪽 담 밖으로 현종(顯宗) 2(1661)에 세워진 성균관의 별당으로 재생들의 학습 장소,

    또는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하여 과거(科擧)를 시행할 때 시험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좌우의 일량재(一兩齋)와 벽입재(闢入齋)의 두 부속 건물이 있었다가 조선 말에 파괴 되었으며,

    중앙의 본 건물 정청(正廳)6.25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888월에 복원되었다.

    규모는 중앙에 정청이 있고, 좌우에는 협실이 있는데 모두 25칸이다.

     

     

     

     

     

     

     

    존경각(尊經閣)

     

    성균관의 교육기관으로서 유생(儒生)들의 학문 연구에 필요한 서적의 부족으로 교육상 많은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에 한명회(韓明澮) 등 제신들이 장서각의 필요성을 주청, 성종의 윤허를 얻어 건립되었다.

    건물이 세워진 뒤 성종이 존경이라 이름하고 많은 서적을 하사하였다.

    그 뒤 장서가 많을 경우에는 수만 권에 이르기도 하였다.

    장서 구성은 성균관의 교육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수집에 있어서도 학령(學令학교모범(學校模範) 등에 정해진 독서 대상 서적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기본 장서는 사서(四書오경(五經제사(諸史)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 도서이고,

    불교는 물론 노장(老莊) 및 기타 잡류의 도서는 금지되었으며,

    농학(農學) 등의 기술계 서적도 수장되지 않았다.

    도서의 수집 방법은 주로 경국대전에 정해진 반서제도(頒書制度)에 따라

    교서관(校書館) 등에서 인출되는 도서를 분급받았다.

    전란 등으로 서적의 부족이 극심할 때에는 지방에서 인출되는 도서도 납본하게 하였으며,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서의 출납은 2명의 전임 직원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다.

    성균관 직제에 의하면 시대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사예(司藝, 4전적(典籍, 6학정(學正, 8) 등의 관원이 업무를 담당하였다.

    따라서 도서관 구성 조건의 세 가지 요소인 건물·장서·직원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1514(중종 9)에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으며,

    그 뒤 곧 재건된 것으로 여겨지나 확실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화재 이후 다시 도서의 수집이 이루어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다시 큰 화를 입게 되어 남은 책이 1, 2종에 불과하였다.

    그 뒤 임시로 존경각을 복설하고 낡아 누락되거나 더러워진 책 일부를 비치해오다가

    1626(인조 4)에 중건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조선 말기까지 계속 유지되고 장서도 증가되었으며, 1895(고종 32) 성균관의 학제 변경에 따라

    경학과(經學科)가 설치되면서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계승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6·25전란으로 인하여 장서는 모두 산실되고, 현재는 건물만 남아 있다.

     

     

     

    육일각(六一閣)

     

    성균관의 무기고였던 곳으로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던 궁시(弓矢: 활과 화살, 활쏘기

    웅후(熊侯: 곰머리 표적미후(麋侯:사슴머리 표적) 등을 보관하는 전각이다.

    (((((()의 육예(六藝) 중의 하나라 하여 육일각이라 하였다.

    명륜당의 동북쪽에 위치한 남향의 두 칸 집으로, 1743(영조 19)에 건립되었다.

    원래 향사례(鄕射禮)와 대사례는 세종 때부터 실시되어 성종조까지 행하여졌으나

    도중에 중지된 것을 영조조에 이르러 다시 부활하여 시행하였다.

    임금이 성균관에 나아가 대사례를 실시하였는데, 대사례가 끝난 뒤에는 그 용구들을 이 전각에 보관하였다.

     

     

     

    향관청(享官廳)

     

    성균관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 올린 제사를 준비하던 향관청과

    실무자들이 머물던 공관인 동.서월랑이 있다.

    향관청은 향축을 보관하고 준비하던 곳이라고 하는데,

    앞면 4칸 건물로 가운데는 대청마루, 양쪽1칸씩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이 건물은 향축을 보관한다기보다는 제사업무에 관련된 관리들의 사무실 기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향관청 앞마당에는 동.월랑 건물이 양쪽에 들어서 있다.

    .서월랑은 감찰집사들이 근무하던 공간으로 향관청 마당을 등지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문묘 제사 때에 제관(祭官)들이 재계(齋戒)하고 향축(香祝)을 보관하던 곳으로서

    성현(成俔)의 건의로 성종 4(1473)에 명륜당 북동쪽에 남향, 10() 규모로 건립되었다.

    이후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효종 4(1653)에 중건되었다.

    중앙에는 제사에 쓰이는 향축(香祝)을 보관하고 좌우에는 헌관방(獻官房)이 있다.

    한편, 향관청의 좌우에는 감찰(監察) 집사(執事)들이 사용하던 동·서향 6()으로 건조된

    동월랑(東月廊)과 서월랑(西月廊)이 있다.

     

     

     

    향관청 좌.우월랑은 앞면 4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행각같은 건물로

    향관청 업무와는 상관없이 성균관내 감찰을 담당하는 집사들이 머무는 공간이.

     

     

     

     

     

    정록청(正錄廳)

     

    성균관의 참하관(參下官)이 입직하여 중요한 시정(時政)을 기록하던 곳이다.

    이 곳에서 기록된 문건은 현책(玄冊)이라 부르며 독() 안에 비장하고 그 출납을 금하였다.

    명륜당(明倫堂)의 동쪽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8칸에 불과한 청사이다.

    1398(태조 7)에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26(인조 4)에 재건하였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한때 성균관 참하관들의 휴게소로 이용되었으며,

    묘사(廟司)와 석전(釋奠)을 관리하는 관원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광복 후에는 성균관과 유도회(儒道會)의 중앙사무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을 말하며,

    성균관은 나라의 인재를 길러내는 조선시대의 으뜸가는 교육기관이다.

    이곳은 유교의 중요한 사당인 동시에 유학을 가르치는 최고 학교였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1398(태조 7)에 처음 세워졌으나 화재와 전쟁으로 여러 번 고쳐 지었고,

    1869(고종 6)에 크게 수리되어 현재에 이른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를 포함하는 영역이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제사 공간이며,

    명륜당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교육 공간이다.

    명륜당 동쪽으로는 학생들을 위한 식당인 진사식당을 비롯한 관리를 위한 부속 시설들이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의 관계를 바탕으로 지방 향교를 포함한 문묘에는 몇 가지 형식이 있는데,

    서울 문묘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을 뒤에 두는 전묘후학(前廟後學)형식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서울 문묘(文廟)와 석전대제(釋奠大祭)

     

    서울 문묘지역은 조선시대의 국가 통치 이념인 유교적 세계관과 관련된 곳으로서,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 공간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묘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에게 석전제를 드리는데, 이를 석전대제 또는 문묘대제라고 한다.

    석전대제는 일반적으로 고기를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제사 의식이며,

    문묘에서 치러지는 석전대제는 엄숙한 제례 절차와 더불어 기악과 성악, 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의 성격를 띤다.

    발상지인 중국에서도 그 원형이 남아있지 않으며, 현재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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