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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재륜 시비(朴載崙 詩碑)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7. 7. 27. 05:00

    박재륜 시비(朴載崙 詩碑)


    박재륜(朴載崙, 1910~2001)

    남한강 유역의 삶과 시대적 상황을 그림처럼 그려낸 시 '남한강'을 쓴 박재륜은 가금면 가흥리에서 출생했다.

    목계나루 건너편, 조선시대 가흥창이 있던 마을이다.

    궁내부 주사였던 그의 조부가 한일강제병합과 함께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옴으로써

    박재륜의 유년시절은 남한강의 아름다운 정취에 파묻혀 살았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된 셈이다.

    고향에서 지낸 30년 간의 삶을 ‘은총과 혜택의 생활’이라고 회고했거니와

    박재륜이 한시에 능하고 품성이 후덕한 일면들은 모두 조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1924년 서울 휘문고보 시절 문학의 길로 들어서 이병기를 스승으로

    박종화, 이태준, 이무영, 정지용, 오장환 등과 교분을 쌓았다.

    학교를 졸업하던 1930년 《조선지광》에 <편지>, <강촌연곡>을,

    이듬해 《신여성》에 산문시 <미스 R號의 風船球>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 <잠오지 않는 밤의 노래> 외 5편의 작품을 발표한 이후 혹독해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절필하고 말았다.

    6·25 피난 중에 고향에 돌아와 정착한 후 1958년부터 작품 활동을 재개하여

    시집 《궤짝 속의 왕자》, 《메마른 언어》, 《田舍通信》, 《설령 높은 마루》와

    시문집 《인생의 곁을 지나면서》 등을 남겼다.






    남한강(南漢江)  - 박재륜(朴載崙)


    그 옛날 고려와 조선조(朝鮮朝)
    뱃길이 발달하였다는 이 물줄기에
    오늘은 다만 글자와 화상 뭉겨진 조상(彫像)만 남았고
    곡식과 소금이 오르내리던 장삿배의 그림자는 그쳤다.
    지난 한때는 공산군과 대진하여 총탄과 포화(砲火)가 서로 맞서던 곳
    예 있던 집 간 곳 없이
    주추만이 남은 빈 자리에
    지금은 무우, 배추꽃이 한창이다.
    원포(遠浦)에는 돌아오는 돛단배도 있었다면
    평사(平沙)에는 기러기 짝지어 내려앉음도 있었으리.
    마음에 그려보는 부조(父祖)의 멋.
    내가 그 멋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듯
    강물이 흐른다.
    내가 오늘을 목메어 하듯
    흐르는 강물이 바위를 넘는다.





    박재륜 연보(朴載崙 年譜)


    1910년 11월 1일 충북 중원군 가금면 가흥리 210번지에서 출생
    1929년 서울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기폭(旗幅) 단선
    1930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Miss R의 풍선구(風船球)"와 "풍경 점점점(風景 點點點)" 발표로 문단 데뷔
    1959~61 충북 중원군 엄정면 신명중고등학교 교장 역임
    1961~62 중원군 교육천 교육감(현 교육장) 역임
    1974년 충주시 목행국민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
    1982~84 한국예총 충주지부장 역임
    1968년 충청북도 문화상 수상



    시문집(詩文集)


    궤짝 속의 왕자 (시집 1959년)
    메마른 언어 (시집 1968년)
    전사통신(田舍通信) (시집 1972년)
    인생의 곁을 지나면서 (시문집 1978년)
    흰수염 갈대풀 (시선집 1981년)
    천상(川上)에 서서 (수필지 1982년)
    고원(高原)의 꽃밭 (시집 1986년)
    설령(雪嶺)높은 마루 (시집 1986년)


     - 충북 중주시 예성로 266 (연수동) 충주체육관 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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