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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감리교회 발상지, 내리교회(內里敎會)
    국내 나들이/기독교(基督敎) 2017. 7. 30. 05:30

     한국감리교회 발상지, 내리교회(內里敎會)

     

    인천은 개항 이후 서구문물 유입의 길목이었다.

    구한말 당시부터 외국 선교사들은 인천을 국내 포교의 거점지역(據點地域)으로 인식하고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무엇보다 인천은 서울과 인접한 데다, 항구도시로서 선교사들이 필요로 하는

    각종 자재와 물품 등을 확보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1883년 새롭게 축조된 인천항이 개항되고 2년 뒤인 18854월 미국감리교회 아펜젤러목사 부부와 함께

    장로교회 언더우드목사가 인천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뎠다.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했던 이들 세사람이 처음 묵은 곳은 화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인천시 중구 중앙동 1가 현 오림포스호텔 근처에 작은 초가집을 빌려 1개월간 머물렀다

    이곳에서 예배를 몇차례 올린 후 아펜젤러 부부는 한양으로 옮겨갔고,

    그 이듬해 5월 전도를 위해 노병일을 인천으로 내려 보냈다.

    이어 노병일은 아펜젤러부부가 구입해 머물던 초가집교회를 처분하고

    1901년 중구 내동 지금의 내리교회 자리로 이전해 벽돌을 쌓아 교회다운 교회를 세웠다.

    인천내리교회는 1964년 화재로 인해 전소된 후 1966년 개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앞서 1955년 교회확장을 위해 교회 머릿돌을 해체했을 때

    1901년 처음 교회를 지을 당시 사용되던 국내 최초의 서울 간행판 성경을 비롯 신앙관련 서적 및

    문서 12가지가 나와 교계 및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들 성경과 서적 등은 한국 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 67번길 3-1 (내동) 내리교회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인천내리교회(仁川內里敎會

     

    내리(內里) 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 내한 주재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Appenzeller/亞扁薛羅, 18581902) 부부가

    188545일 오후 3, 때마침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는 제물포 항에 내림으로써 시작된

    한국 개신교회의 어머니 교회들 가운데 하나이다.

    유서 깊은 교회인 만큼 숱한 역사적 흔적들이 고스란히 간직된 곳이다.

    무엇보다도 1888년 약관(弱冠)의 나이 20살에 한국에 들어왔고 인천에 장장 11년간 체류한

    조지 존스(George H. Jones/趙元時, 18671919) 선교사의 서해권(西海圈) 선교(인천 해주 등)의 전진기지로서의

    얼이 서려 있고, 역사적 발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존스의 주선으로 1903년에 하와이로 건너간 최초의 공식 이민단 102명 중에 50명이 내리교인들이었으며,

    같은 해에 한국 최초로 홍승하(洪承河, 18631918)를 하와이에 보내

    미주 최초의 한인교회인 호놀룰루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가 시작되었다.

    내리는 이처럼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들어온 교회인 동시에 최초의 해외 선교사를 내보낸 교회이기도 하다.

    1892년 존스 부부에 의해 시작된 영화(永化) 학교는 우월(又月) 김활란(金活蘭, 18991970) 등을 배출한

    명문학교로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초등교육기관으로 유장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 밖에 3· 1 민족 대표 33인 중에 한 분인 동오(東吾) 신홍식(申洪植, 18721939) 목사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만기 옥고를 치른 후 내리의 담임자로 부임해(19221927)

    仁川內里敎會歷史’(1923)를 손수 기록해 오늘까지 중요한 사료로 전승되고 있다.

     

     

     

     

     

     

    A Pioneer of Korean Methodism

    Henry G. Appenzeller

    (1858~1902)

     

     

     

    A Father of Methodist

    Mission in Incheon-Kangwha

    George H. Jones

    (1867~1919)

     

     

     

    The First Ordained Preacher of Korea

    Kim Keui Pom

    한국 최초의 목사

    金箕範(1869~1920)

     

    최초의 한국인 집사목사(세례와 혼례·예배·전도의 거행권 만이 부여됨) 중 한 사람이다.

    1890년에 기독교에 입교, 1893년부터 전도사가 되어 제물포지역에서 8년간 전도 사업에 종사하였다.

    감리교의 지방회에서 개최하는 신학회(Theological class: 신학교의 전신)에서 목사안수 과정을 밟고 난 뒤,

    19015월 서울 상동교회에서 김창식과 함께 북감리교회의 감독 무어(Moore, H.)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뒤 황해도 연안지방에서 순회 전도하다가 제물포의 내리교회(內里敎會)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교회재단의 영화학교 교장으로서 교육 사업에도 공헌하였다.

     

     

     

    188545일 아직 어둠 깊고 온갖 사슬이 백성을 옭아메고 있었을 때,

    아펜젤러는 빛과 자유의 복음을 들고 비 젖은 제물포항에 내려 1902611일 순직하기까지

    이 땅의 험로(險路)마다 헤치고 다니며 교육과 선교의 초석을 놓으시었다.

     

    188851420세 청년동안(靑年童顔)으로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존스는

    1911년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빼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내리교회를 거점 삼아

    교육, 선교, 행정, 출판, 이민, 학술연구 등에 눈부신 업적을 남기시었다.

     

    1901514일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김기범(金箕範)은 제물포 선교의 첫 열매로서

    초대 교인들의 존경과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면서 한국적 교회의 만세반석을 다지시었다.

    실로 아펜젤러는 씨앗을 뿌렸고, 존스는 김메고 물을 주었으며,

    김기범은 첫 열매로서 토착화 교회의 서장(序章)을 여시었도다.

     

    이제 여기 세 분의 흉상을 세워 만고의 사표(師表)로 삼고자 하노라.

     

    주후 을유(乙酉) 2005717

    내리교회 담임목사 김흥규(內里敎會 擔任牧師 金興圭)

     

     

     

    조원시(G.H.Jones)목사를 쓰시어 1903113일 미주땅에 한인디아스포라를 허락하셨다.

    그해 1110일에 인천내리교회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하와이 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니

    해외에 설립된 최초의 인천내리교회 지교회이다.
    밀알 한 알이 미주 땅에 떨어져 썩으므로 미국에 3,197개의 한인교회로 자랐다.

    미주한인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아  지난 118년 동안 인천내리교회를 섬긴 성도들에게

    미한백상 선교대상을 드리며 인천내리교회를 쓰시어 맑은 영성이 주님의 은혜로

    미주한인교회에 꾸준히 흘러가도록 기도하며 여기 새깁니다. 

     

    2003119

     

     

     

    2007 한국교회대부흥 100주년기념교회

    2007. 7. 8

    2007 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함께 나누는 세상

     

    우리 교회는 남북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일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내리교회

     

     

     

     

    미주 한인 선교 100주년기념비

     

    작품의 상징과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하와이로 이주한 102명의

    세계를 향한 주님의 비전(Vision)

    민족해방과 자주국가 건설에 땀 흘리며 노동현장에서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해간 승리(Victory)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께만 찬양과 영광 돌리며 살아온 그들의 생애와 한국 교회의 역사를 열어간

    내리교회의 시작과 함께 만민의 영혼을 구원하고저 울려 퍼지던 복음의 종을 살아있는

    주님의 음성으로 영원한 시간속에 간직하면서

    미주한인선교100주년기념비를 내리교회 터전 위에 높이 세운다.

     

    이 기념비는 조각가 심재현 장로에 의해 제작되어 20021117일 세웠다

     

     

     

    한국선교120주년기념비

    기독교대한감리회 내리교회아펜젤러선교120주년기념회

    2005. 4. 5

     

     

     

     

     

    한국최초, 인천최고 100선 엡윗청년회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선구인 감리교 청년단체

     

     

    엡윗청년회(懿法靑年會)

    1897년 제13회 미감리회 한국선교연회의 결정으로 창립한 청년단체이다.

    창립이후 한국 청년운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 담당하였다.

    13회 미감리회 한국선교연회(1897. 5. 5 ~10)가 조이스(I. W.Joyce)감독의 주재하에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선교연회에서 조이스 감독은 엡웟청년회의 설립을 권면하였고, 회원들이 이를 받아들여 엡웟청년회 설립이 결정되었다.

    곧 이어 존스(Gh. H. Jones, 趙元時), 노블(W. A. Noble, 魯普乙), 페인(J. O. Paine, 陛仁), 노병선, 김기범, 이은승 등이

    위원으로 선임되어 연합회 중앙조직이 구성되었다.

    이후 연합회 산하 개 교회 청년회가 속속 조직되었다.

    먼저 인천 내리교회 나인데 청년회를 시작으로, 189795일 상동교회 말랄류청년회,

    같은 해 922일 평양 남산현교회 굿셀청년회, 이윽고 정동교회에서도 같은 해 1028

    (워렌청년회), (조이스청년회) 청년회가 각각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6개월 후에는 미감리회 선교거점이었던 인천, 서울, 평양 등지에 5개의 청년회 지회가 설립되었고, 회원수도 150명에 이르렀다.

    한편 남감리회에서도 선교거점인 개성에서 1902년에 엡웟청년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엡웟청년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체결되자 전덕기, 정순만 등 상동교회 청년회원들이 조약에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1906년 열린 한국선교연회에서 엡웟청년회의 해산이 결정되었다.

    친일인사로 유명했던 해리스(M. C. Harris)가 이 연회를 주재했었는데, 연회를 마치고 난 후 잡지사 인터뷰에서,

    연회 개회중에 엡웟청년회 대회를 열고 싶다고 했으나 결국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청년들은 걸핏하면 종교 집회를 명목으로 국사를 열심히 논하고 정치의 득실을 논하여

    결국은 분규를 일으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엡웟청년회에 대해 반감을 표하였다.

    1908년 제물포교회의 요청에 따라 존스 선교사가 엡웟청년회의 재조직을 건의하였으나 이 또한 묵살되고 말았다.


    하지만 1916년 조선연회에서 이익모, 이하영, 손정도, 김유순 등 한국인 연회원들의 청원으로 엡웟청년회의 재조직이 결정되었다.

    이후 교회 청년회가 속속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삼일운동이후 청년운동 전체가 활기를 띄면서 교회 청년회 조직결성은 더욱 활발해 졌다.

    1920년대 말까지 미감리회 엡웟청년회는 전국 13개 지역에 전체회원 2천여 명을 웃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남감리회 엡웟청년회도 가파르게 성장하여,

    전국에 72개 청년회가 조직되었고 전체회원은 2천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청년회 조직과 활동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개 교회 차원의 청년회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전국연합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925년 9월 남감리회 웹웟청년회 전국연합회가 먼저 결성되었고,

    이윽고 1929년 6월 미감리회 웹웟청년회 전국연합회도 그 뒤를 이었다.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통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현 기독교대한감리회)가 탄생하였다.

    감리교회가 통합함에 따라 엡웟청년회는, 교파 통합에 따라 새로 조직된 총리원 교육국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이로써 엡웟청년회는 명실 공히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청년조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1931년 7월에 「조선엡웟청년회연합회」도 창립총회를 열고 새로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청년회연합회는 1933년까지 26개 지역에서 177개 청년회로 발돋움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종교간섭이 심화되고 조선감리회 또한 일본 감리교회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기 시작하면서 엡웟청년회는 또 한 번 해산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즉 1938년 엡웟청년회는 지도감독을 맡고 있던 총회 교육부 총무가 ;조선감리회보 11월 1일자에 게재한 공문,

    “엡웟청년회 현하 비상 시국에 감(鑑)하여 지난 제3회 총회에서 엡웟회는 정지하고,
    교회내 청소년들의 전신수양은 주일학교 청소년부에서 하기로 결정하였아오니 하량하시고

    엡웟회는 해산하시옵 소화13년(1938) 10월 27일 교육부 총무 유형기”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일제말기 개신교 교파들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폐합되었다가, 해방이후 속속 재건하면서

    감리교회도 1949년 4월 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재건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0월 21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청년회 전국연합회」가 창립하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최초, 인천최고 100선 내리교회

    우리나라 감리교의 발상지

     

     

     

    내리교회(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이곳은 고종 22(1885) 719일 아펜젤라 목사에 의해

    감리교 제물포(내리)교회를 설립한 것이 한국 최초의 선교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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