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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월리엄 스코필드, 그가 있어 제암리가 기억되고...국내 나들이/청와대(靑瓦臺) 2017. 10. 30. 04:30
프랭크 월리엄 스코필드, 그가 있어 제암리가 기억되고...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석호필 石虎弼, 선교사,수의학자)
1889년 영국 워릭셔(Warwickshire)주 럭비(Rugby)시 출생
1907년 캐나다로 이민, 토론토(Toronto) 대학교 수의과 대학(현 겔프대학교) 입학
1911년 토론토대학교에서 수의학박사 학위 취득
1916년 아내와 함께 한국 입국,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 및 위생학 강의, 한국 이름을 석호필(石虎弼)로 지음.
1919년 3.1독립운동 장면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해외에 알리는 등 측면 지원
일본인 주간의 영자 신문에 일본 정책을 비판하는 글 기고
제암리 현장 답사 후 캐나다 선교부에 ‘제암리 학살 보고서’ 제출
‘수촌리 학살 만행 보고서’를 ‘장로회 기관지’인 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Presbyterian Witness)에 기고
서대문형무소 방문, 유관순 열사 등 3.1운동관련 형 복무자 격려
1920년 캐나다 귀국 후 한국에서 자행되는 일제 만행을 캐나다, 미국에 알리는 등 운동 전개
1958년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한국 방문,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수의병리학 담당
1959~1970년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 후 보육원 후원 및 사회봉사활동에 헌신
1970년 4월 12일 영면, 국립 서울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제암리 대학살
한국민족주의자들을 진압하던 중 일본 군대와 경찰이 저지른 한 만행에 대한 보고
대학살의 전말
4월 15일 화요일 이른 오후, 일본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성인 남성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에게 전달할 말이 있으니 모두 교회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교회에 모인 23명가량의 남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 지 걱정하면서 명령에 따라 바닥에 앉았다.
잠시 후 군인들이 교회를 둘러싸고 종이 창문 너머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청년들은 명령의 진의를 알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죽거나 다쳤는데도 악마 같은 군인들은 불에 잘 타는 초가지붕과 목조건물에 불을 질렀다.
몇사람이 뛰쳐나와 도망쳤지만 그들은 곧바로 총검에 찔리거나 총에 맞았다.
탈출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6명 사체가 교회 밖에서 발견되었다.
교회에 불려간 남편을 찾아 두 명의 부인이 군인들의 포위를 뚫고 교회로 가려했지만 모두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19세의 젊은 부인은 총검에 찔려 죽었고 40대의 여성은 총에 맞았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그 후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
이것이 제암리에서 벌어진 피의 대학살 사건의 간략한 기록이다.
- 제암리 대학살 -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Dr. Frank W. Schofield)의 조사 (1919년 4월) 중
1919년 4월 15일 제암리에서 일본 군대와 경찰들이 제암리의 주민들을
총칼로 찔러 잔인하게 살해하고 불태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제암리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는 수원역까지 열차를 타고 와서
경계가 삼엄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자전거를 이용하여 제암리 현장까지 달려갔다.
제암리 현장에 도착한 스코필드는 처참한 제암리의 현장을 목격했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마을 주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돌아온 스코필드는 제암리 현장의 사진 및
기록을 국외에 보내 일본의 비인도적인 침략행위를 알렸다.
기념식수
설탕단풍(Sugar Maple)
스코필드 박사의 손녀 리사(Lisa Schofield Crawford) 기증
201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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