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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 강화성당(天主敎 江華聖堂)과 진무영 순교성지(鎭撫營 殉敎聖址)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7. 11. 30. 20:37

    천주교 강화성당(天主敎 江華聖堂)과 진무영 순교성지(鎭撫營 殉敎聖址)

     

     

    천주교 강화성당(天主敎 江華聖堂)

     

    1958129일 김포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는 장금구 그리소스토모 신부이다.

    조선시대 말, 두 번의 박해시기에 이미 강화도에는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있었다.

    이후 충청도에서 이주해온 몇 명의 신자들에 의해 전교가 활발해지면서 대산리·부근리·온수리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6.25전쟁으로 공소가 폐지되었다가 1952년 이재명(야고보)이 김병태, 최명선과 함께 다시 공소 예절을 재개하였다.

    195711월 강화공소를 설정하였다.

    196010월 성당·사제관의 축성식이 있었으며, 이후 1983년까지 모두 13개의 공소를 건립하였다.

    더리미공소를 제외하고 다른 공소들은 지금까지 존속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1 (관청리)

     

     

     

     

    강화성당의 설립

     

    병인박해(1866) 이후 강화도 지역에 다시 신앙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은 이 아가다라는 교우를 통해서였다.

    서울에서 살던 이 아가다의 부모가 병오박해를 피해 충청도 홍성으로 이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병인박해 때 순교를 하게 된다.

    이에 부모를 잃은 3남매는 유리걸식을 하다 두 남매는 어린 나이에 죽고, 이 아가다만 강화도로 오게 된다.

    1871, 이 아가다는 외교인 김해 김 씨와 관면혼배를 하고 대산리 3번지 돌모루에 살면서 남편을 세례 받도록 했다.

    그 후 이 아가다는 딸 김부엉 루이사를 9살 되던 해에 제물포 본당 구내 샬트르 바오로 수녀회가 운영하고 있던 보육원으로 보냈다.

    보육원에서 자라던 김 루이사가 17세 되던 1909, 당시 답동본당 주임 드뇌(1873~1947) 신부는

    루이사와 영종도 교우 안일만 바오로를 혼인하도록 하였다.

    1922년 봄, 안일만 가족은 강화읍 대산리 돌모루로 이사하여, 슬하에 안영진(일명 순흥) 아가다와

    안경옥 필립보, 안경남 라우렌시오 3남매를 키우면서 신앙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강화본당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이 아가다와 그녀의 딸 내외가 살며 전교활동을 하던 대산리 마을은 한국전쟁 후 북한과 인접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현재는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아울러 그녀가 처음 살던

    곳은 현재 잡풀이 우거진 채 철조망으로 막혀 민간인의 접근은 물론 사진 촬영도 금지되고 있다.
    1925, 충청도에서 하점면 부근리와 송해면 하도리 지역으로 이사 온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점을 경영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안경수 토마 전교회장(교리교사)이 대산리와 하도리 등지를 다니며 유아세례를 베풀었고,

    답동본당 드뇌 신부와 보좌 이여구(마티아)신부가 부근리공소를 방문하여 신앙공동체를 돌보았다.

    그러나 옹기마을의 운영이 잘 되지 않아 신자 도공들이 마을을 떠나게 되어,

    1935년 부근리공소 모임도 자연 중지되고, 대산리공소로 통합하게 되었다.

     

    1928년에는 충청남도 서산군 팔봉면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양촌명 외 9명의 신자들이 온수리 독점마을로 이주해 온다.

    처음에는 하점면 부근리공소로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자 수가 늘어나자 19336월 정태준 안드레아의 집을 이용하여

    온수리공소를 시작하였고, 이때 답동본당 보좌 신부인 나 라가르드(1903~1988)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였다.

    당시 교우 수는 20여명이었다. 대산리에 살던 안일만 부부도 처음에는 부근리공소로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고,

    1931년부터 같은 마을 노창빈(세례명 베드로) 가족을 대상으로 전교하여 193412월에 노창빈이 세례를 받고,

    같은 날 삼산면 송가에 사는 56세 된 이 루이사도 함께 세례를 받았다.

     

     

     

     

     

     

     

     

     

     

     

     

     

     

    병인양요(丙寅洋擾)와 강화도(江華島)

     

    1866(고종 3), 고종(高宗)의 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조선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많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丙寅迫害).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 침입한 사건을 병인양요라 한다

    병인박해 때 화를 면한 리델 신부는 장치선을 비롯한 여러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으로 충청도에서 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박해 소식을 전하면서 조선에 대한 보복원정을 촉구한다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은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9)는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수도 서울까지의 뱃길을 살피기 위한 예비적 탐사원정이었고,

    2(10)는 수십 일 간 강화도를 점령, 정족산성 전투까지 벌이는 등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복 차원의 무력원정이었다.

    프랑스 함대의 1·2차 조선원정길에는 리델 신부가 통역으로,

    조선인 천주교 신자 최인서(崔仁瑞최선일(崔善一심순여(沈順汝) 3명이 물길 안내인으로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리델 신부가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할 때 그를 따라 나섰던 사람들이었다.

    리델은 강화도 땅에 제일 먼저 발을 디딘 천주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해 11,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이 퇴각할 때 그들의 배에는 조선인 천주교 신자 10명이 타고 있었다.

    위의 물길 안내인 3명과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있을 때 리델 신부를 찾아 온 김영이(金榮伊),

    그리고 작약도에 배가 잠시 머무르고 있을 때 조선 내의 천주교 박해상황을 리델 신부께 알리러 온 신자 

    장치선(張致善송운오(宋雲五이성의(李聖宜이성집(李聖集박복여(朴福汝김계쇠(金季釗) 6명이었다

     

    중국 상해에 도착한 19명의 천주교 신자 중, 최인서·장치선·김계쇠 등은 이듬해(1867) 4월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1년 뒤, 장치선과 최영준은 강화에서 순교한다.

     

     

     “사학 죄인 장치선(張致善최영준(崔英俊)이 진무영(鎭憮營)으로 압송되어 효수되었다.”

    <일성록>(1868. 5. 22.)

     

    효수(梟首)’? 여러 사람에게 경계하게 하기 위하여 죄인의 목을 베어 긴 장대에 매다는 형벌을 말한다.

    진무영은 조선 후기 해상방어를 위하여 강화도에 설치한 군영으로 옛 농협중앙회 자리가 그 터로 알려져 있다.

     

    장치선(張致善: 1830~1868)

    5살 때 세례를 받았으나 세례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찍부터 조선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신부 12명 모두를 경향 각처를 다니며 만날 정도로 열성적인 신자였다

    1866년 박해가 시작되자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병인양요 후 프랑스 함대가 퇴각할 때 리델 신부를 따라 여러 신자들과 함께 중국으로 갔던 그는 1년 뒤 귀국한다.

    서울에서 머물며 칼레 신부의 지시대로, 교우들의 상황을 살피면서

    앞으로 조선에 들어올 새 신부를 맞이할 방법을 강구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최영준(崔英俊: 1811~1868) 일명 인서(仁瑞)

    경기도 용인사람으로 프랑스 앵베르 주교에게 세례(세례명 요한)를 받았다.

    서울 아현동에서 회장직을 맡아 선교사들은 물론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는 한편

    중국 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병인박해 때 조선을 탈출하는 리델 신부를 따라 중국에 갔으며,

    조선 원정의 프랑스 함대의 물길 안내인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퇴각하는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중국 상해에 갔다가

    이듬해(1867) 장치선·김계쇠 등과 함께 귀국하여 쌀장사를 하며 서울에 머문다.

    그리고 1년 뒤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어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형,

    조 참봉의 부친과 함께 58세로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가톨릭 노동사목의 시작

     

    이곳은 1968년 산업화의 그늘에서 고통당하던 심도직물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한국 천주교회와 가톨릭 노동청년회가 그 첫 발을 내디딘 곳입니다.

     

    2015510

    천주교 인천교구 최기산 보니파시오 교구장 주교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천주교 강화성당(그리스도 왕) 미사시간 안내

     

    주일: 06:00, 09:00(본당, 냉정리 공소) 11:00(교중), 18:00(청소년), 특전(토요 16:00 어린이)

    평일: 06:00(), 10:00(,), 19:00(,) 매월 첫토요일 10:00(신심미사)

     

     

    진무영 순교성지(鎭撫營 殉敎聖址)

     

    진무영은 1700(숙종 26)에 해상방어를 위해 설치된 군영(軍營)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1868522, 최인서(崔仁瑞 : 요한, 애오개 회장, 59), 장치선(張致善 : 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 59),

    박서방(朴順集 베드로의 형), 조서방(趙參奉의 부친, 50여세) 등이 순교하였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1866~1871)로 성직자 12명 중 9명과 신자 10,000여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분인 리델(Ridel) 신부를 배로 천진(天津)으로 탈출시키고, 서양 배를 불러다가 신교(信敎)의 자유,

    남은 교우들의 구출, 성교(聖敎:천주교) 전파 등의 목적으로 상해(上海)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 까지 성직자의 보호와 신교의 자유,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2004. 9. 20.

    천주교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

     

    1866년 병인양요 때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강화읍 진무영에서 수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당시 순교한 교인은 최인서, 장치선, 박서방, 조서방 등등, 현재는 이들을 기리는 진무영 순교성지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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