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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목역사관(濟州牧歷史館)
    국내 나들이/제주도(濟州道) 2018. 1. 29. 21:12

    제주목역사관(濟州牧歷史館)

     

    300년전 제주의 오랜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역사체험 전시 공간으로

    1전시실에는 제주목의 역사적 변천사와 발굴 및 출토유물, 2전시실에는 부임목사의 생활상 및 행렬도,

    3전시실에는 제주읍성내 주요건물 및 변천사 등

    당시 제주목의 생활상과 역사를 이해하고 조명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제주목관아, 재구성 되다.

     

    탐라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 관아는

    1434(세종 16)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206칸의 관아 건물이 세워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관아를 헐어 콘크리트 건물로 제주도청, 제주도경찰서를 설치한 뒤

    이어 제주지방법원과 제주지방경찰청을 이곳에 배치함에 따라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후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크게 세 번에 걸쳐 재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1~3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는 제주목 관아의 중심시설인 동헌지와 내아건물시설은 물론,

    중대문-동헌지 마당으로 연결되는 중심도로가 밝혀졌다.

    또한 1998년도 4차 발굴조사에서 외대문, 중대문지를 비롯하여 홍화각, 애매헌, 호고, 호적고,

    우련당, 향리방, 영리장방, 성내연못, 우물 등의 시설물과 이를 둘러싼 담장지가 확인되었다.
    제주목 관아는 위와 같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초석·기단석 등과 탐라순력도(1703)

    탐라방영총람(1760) 등의 고문헌을 토대로 200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란 고려·조선시대의 지방행정 단위로서, 지방의 중요한 지역에 설치되었다.

    고려 성종 2(983)에는 12, 현종 9(1018)에는 8목을 두었고, 태종 13(1413)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여기에 20목을 두어 각 목에는 정3품의 지방관인 목사(牧使)를 파견하였다.

    제주목과 함께 전라도에 소속된 목에는 광주목, 나주목, 능주목(지금의 순천시)가 있었다.

    이후 태종 16(1416) 제주목사 겸 도안무사 오식의 건의에 의해

    제주의 지방행정구역은 제주목(濟州牧정의현(旌義縣대정현(大靜縣)에 삼읍체제로 개편되었다.

    시기에 따라 삼읍의 경계 및 행정구역의 범위에 다소 변화가 있었으나, 조선말기까지 이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탐라지(耽羅志)

     

    1653(효종 4) 이원진(李元鎭)이 편찬한 제주도.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읍지. 1책 목판본

    제주목사 이원진이 편찬하고 제주도의 석학인 전적(典籍) 고홍진(高弘進)이 감교(監校)로 완성되었다.

     

     

     

    이형상목사 간찰

     

    숙종 때의 제주목사로 재직한 이형상목사(1653~1733)가 작성한 서간문

     

     

     

    영해창수록 인조 20(1642)

     

    박성석 제주목사가 저술한 필사본이며 숭정기원후 임오(1642)에 간행된 책.

    선조인 박충원(仲初)이 전대 목사인 조사수(季任)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수가 수록됨

     

     

     

    제주목사 부임하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12현 체제로 편제되어 전라도 관찰사(2)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에 제주목에는 제주목사(3), 정의대정 양현에는 현감(6)이 파견되었으며,

    또한 목에는 목사를 보좌하는 관리로 판관(5)이 두어졌다.
    원칙적으로 12현 모두 상위관서인 전라도 관찰사의 지휘감독을 받아야 했지만,

    제주도가 지리적으로 전라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유로 관찰사의 권한 중 일부를 제주목사에게 이양함으로써

    목사는 제주목을 총괄하면서 정의대정현 지역을 감독규찰해 나갔다.
    제주목사는 행정적 기능 외에 군사적인 기능 수행이 강조됨에 따라 군사적 직책이 겸임되어

    절제사[만호안무사방어사] 등의 직함을 사용하였으며, 형벌, 소송의 처리, 세금의 징수, 군마 관리, 왜구의 방어 등

    제주도의 모든 행정을 집행하고 사후에 전라도 관찰사에게 1년에 2차례 보고를 행하여야 했다.

     

     

     

    제주목사 교지(濟州牧使 敎旨) 광서(光緖) 14(1888)

     

    송구호(宋龜浩)를 통정대부 행 제주목사로 임명하는 내용

     

    송구호(宋龜浩)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무신. 고종 때의 제주목사. 1888(고종 25) 7월 부임하고 18904월에 떠났다.

    목사로 재임하면서 1890년 봄 모홍혈(삼성혈)에 제각을 세움.

    그의 이름과 아들 영직(榮稙)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명이 방선문(訪仙門)에 남아 있다.

     

     

     

    제주목사 유서(濟州牧使 諭書) - 광서 14(1888)

     

    송구호를 통정대부 행 제주목사 겸 제주진병마사수군절제사 전라도수군방어사로 임명하여 내린 유서로 27번째 밀부라고 적혀 있음.

     

     

     

    이익태 목사(李益泰 牧使)

     

     

     

    이형상 목사(李衡祥 牧使)

     

     

     

    이원조 목사(李源祚 牧使)

     

     

     

    제주목사 286명 제수받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는 총286명에 달한다.

    제주목사의 임기는 2년 반(30개월)이나 일신상의 이유나 문책 등의 사유로 인해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이가 허다하였고,

    부임을 명받았으나 오지 못했던 이도 12명이 된다.

    한편, 조선시대의 관리임용에 상피제(相避制)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제주출신이 제주목사로 임명될 수 없었으며, 평균 재임기간은 대략 110개월 정도이다.

     

     

     

    제주목사 선정을 베풀다

     

    중추원사 기건이 죽었다.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고지식하여 세세한 행동도 반드시 조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또 제주목사였을 때는 백성들이 전복을 공물로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22. 세조 61229일 신축조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사냥할 때에 채찍 하나를 가졌었는데, 임기가 차서 돌아올 때 그 채찍을 벽 위에 걸어 두었었다.

    후에 섬(제주) 사람들이 보배처럼 간수하여 매양 목사가 도임하면 채찍을 내어 놓았다.

    세월이 오래 되자 좀이 먹어 부서지니 화공(畫工)을 시켜 그 채찍의 형상을 그려 걸어 놓았다.

    이긍익 연려실기술6, 성종조고사본말 성종조의 명신

     

     

     

     

    제주읍성(濟州邑城), 축성되다. 사라지다

     

    읍성은 행정적·군사적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축조한 성으로,

    이곳에는 지방민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관아시설 및 민가 등이 형성되어 있었다.
    제주읍성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1105(숙종 10)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성곽이 축성되었는데

    당시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시대의 성곽을 일부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기 제주읍성은 지금의 산지천과 병문천을 자연 해자(垓字)로 삼고 그 안쪽에 성벽을 쌓아 만들어졌다.

    그러다 1565(명종 20) 곽흘 목사는 성 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겪는 불편함을 없애고,

    을묘왜변의 고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동쪽 성을 가락천 밖으로 넓혀 축성함으로써

    이로부터 산지천과 가락천이 제주읍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인 1599(선조 32) 성윤문 목사는 성 굽을 5척이나 늘리고,

    높이를 13척으로 높이는 등 제주성의 대수축 공사를 단행하였다.

    또한 남·북수구에 무지개다리(홍예)를 놓고, 그 위에 각각 제이각과 죽서루를 건립하여 남수각·북수각으로 불렀다.

    하지만 겨울철 공사가 이루어져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고 사상자도 발생하여 '원축성(怨築城)'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폭우 때마다 산지천이 범람하여 민가가 침수되는 피해가 계속 발생하자

    1780(정조 4) 김영수 목사에 의해 길이 551, 높이 9척의 간성(間城)이 축조되었다.

    그는 북쪽 간성에 수복문(受福門)을 세워 광제교(光濟橋)와 연결하고, 남쪽 간성에는 소민문(蘇民門)을 설치하였다.

    1847(헌종 13) 이의식 목사가 수복문을 중인문(重仁門)으로 개칭하였다.
    한말까지 유지되었던 제주읍성은 일제강점기 내려진 1910년 읍성철폐령으로 차례로 헐리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공사가 이루어져,

    바다 매립을 위한 골재로 사용되면서 제주읍성은 대부분 헐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현단 위쪽(제주시 이도1)에 일부 잔해를 간직하고 있는 성벽을

    제주도기념물 제3(1971. 8. 26)로 지정·관리해 오고 있다.

     

     

     

    제주읍성, 성곽구조를 살피다

     

    제주읍성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허튼층쌓기(층을 이루지 않고 수평줄 눈을 허트려 쌓는 일)'의 축조방법을 하고 있다.
    조선초기 제주읍성의 규모는 성 둘레가 4,394, 높이가 11(세종실록지리지성 둘레 910,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사록에는 둘레 4,700여척, 높이 11)으로 기록되며,

    곽흘 목사가 확장한 후 성둘레는 5,489, 높이는 11(이원진의 탐라지, 이원조 탐라지초본)로 기록되어 있다.

    제주읍성에는 동··남문 3문과 남·북수구(水口)가 있었고, 성곽 시설로 옹성(甕城·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큰 성문밖에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작은 성) 치성(雉城·성벽으로 올라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벽 일부 구간을 돌출시킨 구조물), 해자(垓字·성벽 바깥을 둘러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운 시설),

    여장(女墻·'성가퀴', 몸을 숨기고 적병을 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등이 있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치성이 27, 타첩이 404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읍성은 조선 태종 때에 성을 수리한 기록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에 축성된 듯 하며,

    세종 때에 성의 부속시설인 옹성, 치성, 해자 설치가 전국적으로 의무화되면서 이때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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