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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관문 조령관(聞慶關門 鳥嶺關) - 사적 제147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8. 21. 21:30

    문경관문 조령관(聞慶關門 鳥嶺關) - 사적 제147













    문경관문 조령관(聞慶關門 鳥嶺關) - 사적 제147


    이 관문은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경주(慶州) 순행차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을 지날 때

    성주(城主) 홍달(洪達)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 지방과 서울 간의 관문이여 또한 군사적 요새지(要塞地)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雞立嶺)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 초부터는

    이곳 초참(草站)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鳥嶺)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25(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 후 충주(忠州)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辛忠元)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肅宗) 34(1708)에 이르러서야 삼중(三重)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主屹關), 2관문을 조동문(鳥東門) 혹은 조곡관(鳥谷關),

    3관문을 조령관(鳥嶺關)이라 이름한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한국의 아름다운 길 - 100선





    軍幕址(군막터) -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의 대기소






    연풍새재비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역봉(마패봉)사이를 넘는 새재는 고려사지리지에 초점(草岾)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새재의 유래는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다는 고개, 하늘재인 옛 계립령을 대신하여 새로 만든 길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에 있다고 하여 새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연풍새재는 조선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도로인 영남대로(한양-부산 350km)의 중요한 분수령이자 군사적 요충지이며

    한강과 낙동강 수계를 연결하면서 문물교류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왕래할 때에도 주로 연풍새재를 경유하였다.

    새재와 접한 마역봉에는 암행어사 박문수가 마패를 걸어놓고 쉬어 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으며

    고사리마을 입구에 있는 소나무는 어사송이라 불리고 있다.

    고개아래 기슭에는 역원(驛院)과 마방이 있었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주막문화가 발달하기도 하였다.

    3관문인 조령관에서 소조령까지를 연풍새재로 불렀으며,

    일제강점기에 이화령이 신작로로 확장되면서 중요도로의 기능이 상실되어 옛 모습을 잃었다.

    2013년 충청북도에서 연풍새재길을 흙길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백두대간 조령비(白頭大幹 鳥嶺碑)





    조령(鳥嶺)의 유래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원은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 마골령)와 이우리재(伊火峴, 이화현) 사이에 있다고 하여

    (사이)재 혹은 새()로 된 고개라고 해서 ()재라고도 한다.

    조령은 조선시대에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영남대로(嶺南大路)라 불렀으며

    군사적요충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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