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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평도시유적전시관(公平都市遺蹟展示館)
    국내 나들이/전시관(展示館) 2018. 10. 9. 04:28


    공평도시유적전시관(公平都市遺蹟展示館)


    2015년 공평동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 한양에서 근대 경성에 이르는

    역사도시 서울의 골목길과 건물터가 온전하게 발굴되었다.

    서울시는 도시유적과 기억을 원래 위치에 전면적으로 보존하여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조성하였다.

    이는 역사도시 서울의 보존과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한 도시정책의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조선 초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역사가 담긴 건물터와 골목길, 1천점이 넘는 생활 유물을 보존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서울 종로구 공평동 센트로폴리스 지하 1층 전체를 전시관으로 만들어 2018912일 개관하였다.

    연면적 3817의 서울 최대 규모 유적 전시관이다.

    전시관의 투명한 유리 바닥과 관람 데크를 걸으면서 발아래로 1617세기 건물터와 골목길이 펼쳐지고

    이는 20142015년 공평 1·2·4지구 재개발에 따른 문화재 발굴 때 나온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부터 수백 년간 사용된 골목길 42m는 관람객이 실제로 걸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밖에 청동화로, 거울, 일제강점기 담뱃가게 간판 등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 1천여 점과

    인근 청진동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 20점도 볼 수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26 (공평동) 센트로폴리스 지하1층





























    주막에서 술잔을 들다.(酒肆擧盃, 주사거배)


    조선 후기 선술집의 모습을 담은 신윤복(申潤福, 1758~?)의 그림이다.

    청색치마를 입고 트레머리를 한 주모, 심부름을 하는 동자의 모습과 함께 도포와 중치막 차림의 선비,

    붉은색 덜렁에 노란 초립을 쓴 무예청 별감, 까치등거리에 깔대기를 쓴 의금부 나장의 모습이 보인다.

    그중 별감과 나장은 흔히 왈짜라고 불리며 기방의 기둥서방을 자처하기도 했던 인물들이다.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항아리 끌어안으며 막은 바람 대한다.

    (擧盃激皓月 抱甕對淸風, 거배격호월 포옹대청풍)”라는 풍류적인 시가 덧붙여 있다.

    나장의 근무처인 의금부는 지금의 공평동 유적 근처에 위치하였는데,

    별감과 나장이 등장하는 혜원의 그림을 통해 술집들로 즐비했을 이 지역의 조선시대 풍경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 한양은 큰 술집이 골목에 가득하고 작은 술집이 처마를 이었다.

    (近來城市之間, 大釀彌巷, 小酷連屋)”라고 할 정도로 술집이 많았다.

    종로 대로변은 시전 행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술집은 대개 공평동 유적과 같은 시전 뒷골목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명문 자기(銘文 瓷器)


    공평동 유적에서는 글자나 부호 등 명문(銘文)이 표시된 다수의 백자(白瓷), 분청자(粉靑瓷), 청자(靑瓷) 등이 출토되었다.

    분청자의 명문은 내섬(內贍), 내자(內子), 경주(慶州) 등으로 그릇의 소비처와 생산지를 가리킨다.

    백자의 굽 안쪽에는 천(), (), (), (), (), (), () 등의 명문이 새겨진 것이 많은데,

    이는 조선 전기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것임을 의미한다.

    이로서 궁궐뿐 아니라 공평동을 포함한 궁궐 주변에서도 관요 백자가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용 중에 명문이 표시되는 그릇도 있었다.

    공평동 유적에서는 백자의 굽에 먹으로 글씨나 부호를 표시한 묵서(墨書) 백자들도 다수 출토되었다.

    묵서 백자에는 쟈근’, ‘막비’, ‘은비’, ‘덕향’, ‘귀금’, ‘막더기등 여성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한글이 쓰여 있었다.

    당시에는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 잔치를 벌일 때 이웃의 그릇을 빌려 쓰거나 그릇을 빌려주는 세기전(貰器廛)을 이용했다.

    따라서 그릇을 되돌려 받기 위해서는 소유 관계를 나타내는 여러 표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견평방(堅平坊)은 어디일까?


    조선시대 한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적으로부터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고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4개의 커다란 문과 4개의 작은 문을 만들었다.

    성 안에는 왕이 사는 궁궐과 나라의 뿌리인 종묘와 사직, 주요 관청들이 모여 있어 나랏일을 논의하던 육조거리,

    그리고, 나라와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시전 등도 만들었다.

    어늘날 공평동 유적이 위치한 견평방은 한양에서도 제일 번화한 운종가 북쪽에 자리하여 사람과 물건들로 항상 북적였던 곳이다.



    공평동 일대는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일반 서민부터 왕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생활상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었다.

    또 태화관, 종로 YMCA 등 민족운동과 관련된 근대유적도 다수 분포해 두터운 역사적 층위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1978년 총 19개 도심재개발지구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6개지구의 재개발사업이 2010년에 완료되었다.

    1.2.4지구는 재개발사업의 시행에 앞서 2010년 문화재 지표조사, 2014~2015년 매장문화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 초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108동의 건물지,

    500여 년전 조선시대 골목길 등의 유구와 1,000여 점의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한양도성 내 전모를 간직한 조선시대 생활유적으로 조선의 폼페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유적을 보존해야한다는 여론이 불거졌다.

    수차례의 전문가 검토회의와 문화재심의 끝에 당초 인근 청진지구와 같이 유적의 일부분만을 옮겨 전시하는 의견에서

    보존과 상생을 위한 서울특별시와 사업시행자 간의 지속적인 노력에 힘입어

    대도시 도심유적으로서는 최초로 공평동 유적을 전면 보존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렇게 조송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도시유적의 역사성, 장소성, 사실성이 유지되어

    장소적 맥락과 도시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옛 서울의 변화과정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동안 서울의 대단위 도시개발 과정에서 발굴되었던 유적은 사업성 등을 고려하여

    유적의 주요부분 일부만을 신축 건축물의 내부에 옮겨 전시하는 소극적인 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공평지구의 개발과 보존 사례에서 보여준 서울특별시의 역할은

    도시의 역사와 개발이 상생할 수 있는 도시개발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울특별시는 문화재보존과 보호라는 기본원칙을 준수하면서도

    민간의 손실 보전을 통해 개발과 보존이 공존하는 공평동룰(매장문화재 전면 보존의 전제와 기준)’을 마련하였고,

    이는 향후 도시유적을 전면 보존할 경우 적극적으로 적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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