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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 진산성지성당(天主敎 珍山聖地聖堂) - 등록문화재 제682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0. 25. 05:28

    천주교 진산성지성당(天主敎 珍山聖地聖堂) - 등록문화재 제682


    천주교 진산성지성당은 ()대전교구 천주교회유지재단 소유의 건축물이다.

    2017529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682호로 지정되었다.

    진산 지역은 조선 후기에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윤지충이 가족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한 곳으로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최초의 박해였던 신해박해(1791)의 진원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후 1887년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어 천주교인들이 다시 모일 수 있게 되자

    공소 형태로 종교 집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민가에서부터 시작된 교회 건물이 몇 차례 지어 졌고

    1927년에 건립된 성당 건물이 현재까지 미사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신해박해 때 순교한 두 신도(윤지충, 권상연)

    교황 프란치스코 방한 때 시복됨(2014816)으로써 천주교 성지로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동서로 긴 축을 가진 3랑식 바실라카(Basilica) 형식으로 맞배지붕, 중앙종탑의 중규모 성당건축의 전형적 모습을 하고 있다.

    목조구조는 내외부에 모두 노출되어 있는데 내부에서는 중앙통로(내이브)의 상부 지붕을 받쳐주는 기둥들이

    가지런하게 배열되어 더욱 차분한 느낌의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중앙통로 상부에 고창(高窓)이 설치되어 있지는 않지만 양쪽의 측랑보다 높은 지붕을 설치하여

    기본적인 바실리카식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외벽기둥 사이의 공간은 징두리를 상부를 모두 유리창으로 마련하여 밝은 분위기의 성당내부를 연출하고 있다.

    주출입구 상부에는 중2층을 두어 성가대석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2004년 수리 때 철거하였다.

    외벽은 원래 비늘판 벽이었으나 후에 몰탈을 덧 씌웠고 종탑 또한 목조였으나

    1983년 철거하고 시멘트벽돌 조로 새로 만들고 현관도 새롭게 덧 붙였다.

    원래 남녀 구분된 현관이 양쪽에 있었는데 가운데로 합쳤고 양옆의 공간은 고해실과 준비실로 사용하고 있다.

    변형된 종탑 정면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건축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절충식 한옥성당의 건축적 특성과 가치를 보여주며, 지역적·종교적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진산성지성당 홈페이지 http://jinsan.djcatholic.or.kr/


    Tel 041) 752-6249

    미사시간 : 주일 오전 10, 평일 오전 11(~) 월요일 미사없음

       주소 : 32700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 (지방리)




















    殉敎者 尹持忠(바오로)記念碑 (), 殉敎者 權尙然(야고보)記念碑 ()






    등록문화재 등록증(천주교 진산성지성당)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진산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피의 증거자가 태어난 계기가 된 진산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1791년 신해박해의 원인인 진산사건은 그 해 5월 모친상을 당한 윤지충 바오로가 교회 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말라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외종 사촌인 권상연 야고보와 함께 유교식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당대 사회에 패륜으로 받아들여졌고 체포령이 떨어지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관아에 나아가 자수함으로써

    179112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당한 사건이다.

    참수 당하기 전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천주를 큰 부모 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윤지충은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진산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두 순교자의 고귀한 정신을 기억하기 위한 곳이다.

     

    윤지충 바오로 (1759-1791)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진산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동생이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이다.

    윤지충은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25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스스로 교회서적을 읽고, 3년 동안 교리를 받은 후에 1787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신앙심과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이로 인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순교의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128(음력 1113),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권상연 야고보 (1751-1791)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종 사촌 동생인 윤지충(바오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이후 권상연은 다른 학문을 접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권상연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128(음력 1113),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진산지역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 윤지헌(프란치스코), 원씨, 김토마스(풍헌), 이여삼(바오로), 이씨(이여상의 형),

    장대원(마티아), 강씨, 이성화(태권 베드로), 오종례(야고보), 임베드로, 이소사(막달레나), 김영오(아오스딩),

    김영삼, 김베드로, 최덕겸, 김공우, 최첨지, 전춘서(안드레아), 전루시아, 이택경의 아들, 손막달레나,

    박운겸, 한경연(정률), 송루시아, 전성백(야고보), 현프란치스코, 장아나스타시아, 김요한, 장정선





    진산성지(珍山聖地)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피의 증거자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있었던 곳을

    흔히 전라도 땅으로 알고 있으나 바로 이곳이 진산이다.

    진산(珍山)은 본래 전라도 땅이었으나 1963년의 행정개편으로 충청남도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1791년 신해박해의 원인인 진산사건은 윤지충(바오로)이 유교식 제사를 거부하여 발생한 사건을 말한다.

    한국 교회 초창기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는 죽음을 앞두고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7915월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윤지충은 정성을 다하여 상례를 치렀으나 외종 사촌 형인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신앙심과 어머니의 집안의 신주를 불사르고 유교식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사회 안에서 폐륜의 행위로 받아 들여졌다

    체포령이 떨어지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관아로 가서 자수하였고 전주에 있는 전라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윤지충은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1791128일에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 성당 부근)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서남쪽 5.5km 인근에 있는 장구동(논산시 벌곡면 도산리 장고티)에서 태어났고,

    지방리나 막현리 일대로 이주하여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산사건의 발단이 된 윤지충의 집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두 순교자의 고귀한 정신을 기억하며 이 자리에 기념한다.

     

    지방리 공소

    진산사건이 발생한 후 이 지역에는 천주교가 잠시 주춤하였으나 새로운 신앙공동체들이 형성되었다.

    지방리 공소는 그 중 하나이다.

    지방리 공소는 본래 가새벌(지방2리 가사벌 마을. 동쪽 500m 사제관 있는 곳)에 있었다.

    가새벌은 병인박해(1866) 이전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와 살던 곳이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이래 탄생한 세 명의 순교자가 가새벌 출신이다.

     김영삼: 1866년 전주에서 순교(참수)

     김 사도요한: 1877년 서울에서 순교(옥사). 김영삼의 동생

     김춘삼(사도요한): 1878년 서울에서 순교(옥사) 

    박해가 끝난 후 가새벌에 큰 공소가 형성되자 초대 회장이 기증한 땅(현재 위치)으로 공소를 옮겼다.

    1927년에는 교우들의 노력으로 성당(현재 건물)을 건립하고 그 해 115일에 봉헌식을 가졌다.

    이후 본당 유치에 적극 나서 1929년에 초대 주임 신부가 파견되어 지방리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성직자가 부족해지자 1931년에 다시 공소로 되었고,

    이후 금산에 본당이 설립되면서 지방리는 계속 공소로 남게 되었다.

     

    진밭들 사적지 

    서쪽 2.2km 인근에 위치한 진밭들(금산군 진산면 두지리)

    긴 밭(長田)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박해시대에는 교우촌이 있었다.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일화가 있는 곳이다.

    다음은 1856913일에 최양업 신부가 쓴 편지의 일부이다.


    하루는 전라도 진밭들이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은 얼마 전부터 거의 마을 전체가 교리를 배우며 세례 준비 중이었습니다...

    제가 저녁나절에 신자 몇 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한 다음,

    아기 세례에 이어 대세받은 아기들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닭이 울 때 일어나 미사를 드릴 예정을 하고,

    영세 준비를 마친 어른 15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백 명이 넘는 포졸들이 마귀 떼같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제가 성사를 거행하고 있는 집을 둘러싸더니 미사 가방과 성작 등을 빼앗아 가기 위해

    제가 있는 방까지 들어오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방 안에 있었는데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 짐을 챙겨 들고,

    뒤 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산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저와 몇몇 신자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가시덤불 사이로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120-121) 

     



    진산성지(珍山聖地)


    진산성지는 1791년 제사 문제로 촉발된 진산사건(신해박해)으로

    한국 최초로 순교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곳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회는 미신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던 제사를 금지하였고,

    그 가르침을 따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실천 때문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들의 제사 거부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불효의 죄로 체포된 윤지충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른 형벌과 죽음을 각오하고

    덕을 쌓는 것이 효성이 부족한 것입니까?"라고 항변하였고,

    천주교를 버리라는 말에, "만약 제가 높으신 하느님 아버지를 버린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그와 그의 사촌 권상연은 전주에서 처형되어 참수로 치명한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2014816일 서울 광화문에서 거행된 124위 시복식에서 윤지충은 대표 순교자가 되었다.

    진산성지는 세 복자(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고귀한 정신과 신앙을 기리며,

    같은 동네에서 거주하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순교한 김영오, 김영삼, 김요한, 김춘삼 등 네 분의 순교자들도 함께 기리고 있다.

    진산성지성당은 2017529일 국가지정 등록문화재(682)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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