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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과 남산 봉수대(南山 烽燧臺)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0. 13. 23:30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과 남산 봉수대(南山 烽燧臺)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제10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1396년(태조 5년)에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래도록(1396~1910, 514년) 성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한양도성의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시기와 축성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을 두었는데,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없어졌다.
2014년까지 한양도성 전체 구간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되고, 숙정문, 광희문, 혜화문은 다시 세워졌다.
남산 봉수대 (南山 烽燧臺)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
봉수(烽燧)는 평균 30리의 거리를 두고 적당한 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烽)을 들고 낮에는 연기(燧)를 피워서 신호하는 전근대적 통신수단이었다.
봉수제도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며,본격적인 국가제도로 확립된 것은 고려시대이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 정비되었다.
세종 때에는 특히 군사기능의 활성화를 위해 전국적인 봉수망을 정비하였다.
이 제도는 임진왜란 후에는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다가 고종 34년(1894)에 폐지되었다.
봉수의 전달은 정세의 완급에 따라 달리했는데, 평상시에는 언제나 한 홰를 들어 무사한 것을 알리지만,왜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국경 북쪽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두 홰,
왜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거나 적이 변경에 가까이 오면 세 홰,
우리 병선과 접전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네 홰,
왜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에 침범한 적과 접전하면 다섯 홰를 들어서 상황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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