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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과 근대가 만난 덕수궁(德壽宮)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0. 12. 19:43

    전통과 근대가 만난 덕수궁(德壽宮)



    대한문(大韓門)


    덕수궁의 정문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우진각지붕집이다.

    원래 정전(正殿)인 덕수궁(德壽宮) 중화전(中和殿)의 정면에 있었던 것을 나중에 동쪽으로 옮긴 것이다.

    1897(광무 1) 고종이 명례궁(明禮宮)을 옛이름인 경운궁(慶運宮)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64월에 그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韓門)으로 고쳤다.

    수리하면서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으며, 각마루에 양성(兩城)을 하고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얹었다.

    대한문의 현판은 당시 한성부 판윤을 지낸 남정철의 글씨다.

     






    중화문(中和門) 및 중화전(中和殿) - 보물 제819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서북으로 피난하던 선조가 환도하여

    이곳에서 정무를 봄에 따라 행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1611(광해군 3)에 경운궁(慶運宮)이란 정식 명칭이 붙여졌다.

    경운궁의 정전으로 초기에는 즉조당(卽祚堂)이 사용되었는데 1897년에 이 전각의 이름을 태극전(太極殿)이라 고쳤다.

    대한제국의 선포로 왕은 황제가 되어 여기에서 하례(賀禮)를 받았으며,

    이듬해 2월 다시 전각 이름을 태극전에서 중화전으로 바꾸었다.

    그 후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인 1902(광무 6)에 즉조당 앞에 새로운 중층의 법전(法殿)을 지어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인정전에 비견될 만큼의 격식을 갖추었으나,

    1904(광무 8) 경운궁의 대화재 때 소실되어 다시 중건된 것이 현재 남아있는 단층의 중화전이다.

    중화전의 평면은 인정전과 비슷한 정면 5(61.4), 측면 4(58)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고,

    넓은 이중의 월대 위에 높직한 초석을 놓아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월대에는 석계가 마련되어 있고, 석계 한가운데에 답도를 놓아 쌍용을 새겨놓았으며,

    각 층마다 석계 모서리에는 석수를 조각해 놓았다.

    고주와 창방에는 낙양각(落陽刻)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건물 내·외부 사이의 기둥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언제나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공포는 내4출목, 3출목의 다포식 구성을 하고 있으며,

    중화전에서 사용된 공포 형태는 외부에 쇠서를 달고 있는 운기당초문으로, 이것은 초각형에 속한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후기 다포의 변화에서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모습으로 특히 궁궐건축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어놓고 토수(吐首)를 끼웠다.

    단청은 은은한 채색의 모루단청이고 광창과 꽃살분합문을 달아 위관(偉觀)을 돋우었다.

    건물의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두 마리를 조각으로 장식하여 건물의 위상을 높였다.

    중화문은 정면 3,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었는데 건축양식은 중화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문의 양 측면에는 남회랑(南回廊: 행각(行閣))이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소실되어 동쪽 모서리 부분만 일부 남아있을 뿐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다.

    중화문은 단층의 삼문으로 세벌대의 기단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두, 잡상 등을 얹었다.

    석대 앞의 석계는 3등분되었는데 중앙부 좌우에만 석수(石獸)를 두고, 답도(踏道)에는 쌍용문(雙龍紋)이 새겨져 있다.

    평면 크기에 비해 기둥 높이가 높아 다른 문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비례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덕수궁 중화전 품계석(德壽宮 中和殿 品階石) 


    품계석(品階石)은 좌우에 각각 12개씩 모두 24개가 놓여져 있으며 조선의 품계는 모두 18계로 나누어져 있다.

    품계석은 좌우로 12개씩 나뉘는데, ()에는 문신(동반)이 우()에는 무신(서반)이 서게 된다.

    그리고 1품과 3품은 정종(正從)으로 나누어서 1품에서 3품까지의 품계석은  좌우 각각 6개씩 모두 12개가 된다.

    4품에서 9품까지는 정종 구분없이 품계석을 세워 좌우 각각 6개씩 모두 12개가 된다.

    이렇게 해서 품계석은 모두 24개가 된다.

    품계석을 36개가 아닌 24개로 한정한 것은 조선이 농경사회에 근간을 둔 국가이기 때문이며.

    24라는 숫자는 곧 24절기를 뜻하고, 24절기는 농경사회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기이고

    하나의 커다란 1년 계획표와 같은 것이다.













    석조전(石造殿)

     

    덕수궁 석조전은 기본설계는 영국인 G.D.하딩, 내부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하였으며,

    1900년(광무 4)에 착공하여 1910년(융희 3)에 완공되었다.

    3층 석조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이며,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서양식 건축기법이 특이하다.
    이 건물은 앞에 있는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의 궁전건축양식을 본뜬 것이며,

     당시에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이곳에서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 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준명당(浚明堂)


    준명당은 처음에는 '준명전(浚明展)'이었다가 어느 땐가 준명당으로 바뀌었다.

    고종이 외국 사신들을 영접하거나 대신들과 만나서 국정을 논의하던 건물로

    1904년 대화재 당시는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가 봉안되었다.

    즉 준명당은 경운궁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동쪽에 자리잡은 즉조당과 같은 기능의 건물로 양식도 유사하다.

    즉조당의 퇴간(退間)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비해 준명당의 근간은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준명당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조선 고종 광무 원년(1897)에 중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한 때 고종황제가 거처하면서 외국사절을 접견하기도 한 곳으로,

    후에는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기도 하였다.

    준명당은 정면 6, 측면 4칸의 방형평면을 뒤쪽으로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L자형 평면을 이룬다.

    뒤쪽으로는 처마밑으로 개흘레(집의 벽 밖으로 새로 물리어 조그맣게 달아 낸 칸 살)가 첨가되고

    쪽마루 끝에 난간을 둘러 실용성있게 하였다. 월랑으로 즉조당과 연결되어 있다.

    건축양식은 기둥 위에 주두를 놓아 보머리(보뺄목:기둥을 뚫고 나온 보의 끝머리)를 받치고 있는데,

    보머리는 둥글게 다듬고, 초각된 부개를 받치고 있는 몰익공식을 이루고 있다.

    준명당의 한자는 '깊을 준()' '밝을 명()'이므로 직역하면 깊고 밝은 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현판의 명()자는 日月이 아닌  目月로 씌여 있다.

    덕수궁 준명당 현판의 ''자가 ''이 아닌 '+'인 것은 단순한 오자가 아닌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라는 해석도 있다.

     



    석어당(昔御堂)

     

    석어당(昔御堂) 덕수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층건물로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은 2 목조 건물이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05년에 복원되었다.

    석어(昔御)’ ‘옛날에 임어(臨御)하였다’,  옛날 선조(宣祖) 머물렀다는 의미다.

    임진왜란으로 피난 갔던 선조가 환도해 1593년부터 시어소(時御所) 사용한 건물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경복궁창덕궁 등을 중건하지 못한 

     곳에서 16년을 지내다1608(선조 41) 승하했다.

    1618(광해군 10)년에 광해군(光海君) 인목대비를  곳에 유폐했으며,

    인조 반정 이후에는 광해군이   앞마당에서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생모)에게 죄를 고하고 인조에게 옥새(玉璽) 건넸다.

    경운궁에 있는 유일한 2 목조 건물로 1층에는 방과 대청이 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마루를 깔았으며 궁궐  건물임에도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이다.

    석어당에는 2개의 편액이 걸려 있고 위층 처마 밑에 있는 글씨는

    1904 중건 당시 김성근(金聲根)  것이다.

    아래층에 있는 글씨는 고조 광무제의 어필(御筆)이다.

    오른쪽 상단에 전서로 '어필(御筆)',

    왼쪽에 '광무 9 을사 7 (光武九年乙巳七月 )'이라고 적혀 있으며

    1905 고조 광무제가  것이다.

    덕수궁(德壽宮)은 고종황제 퇴위후 황제위에게 밀려난 고종황제에게

    부인 궁호일 뿐이며, 원 명칭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덕수(德壽)란 조선시대초 정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던 태조에게 붙였던 명칭으로

    물러난 왕에게 덕을 누리며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올리는 일종의 보통명사이다.

    덕수궁은 고종황제께서 아관파천(俄館播遷, 1987)후 환궁하시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는데

    이유는 이미 1880년대에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 서양 여러나라와 수교하면서

    공사관 부지로 떼어준 관계로 각국 공사관옆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정관헌(靜觀軒) -등록문화재 제82호

     

    1897년 대한제국을 세운 고종 황제(1852~1919)는 서양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선 서양문명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 대표적인 건축물이 덕수궁(당시 경운궁)에 있는 정관헌(靜觀軒)이다.

    고종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에게 설계를 맡겨 1900년 정관헌을 완성했다.

    정관헌은 고종이 가배차(嘉排茶.커피)를 마시고,

    음악도 즐기며 대한제국의 개혁정책을 구상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고종이 당시 외교사절을 불러 연회(宴會)를 열었던 사교장 역할을 했다.

    100여 년 전 급박했던 국제정세에서 고종이 휴식을 취하며 국가의 앞날을 고민했던 장소다.

    덕수궁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졌다.

    서양과 한국의 건축양식을 결합한 독특한 형태로 2004년 등록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됐다.

    2006년8월부터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함녕전(咸寧殿)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임금님의 생활공간(침전)이다.
    광무 1년(1897)에 지었는데 광무 8년(1904) 수리공사 중 불에 타, 지금 있는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곳은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 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붙여 평면이 ㄱ자형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인데 위쪽에 여러 가지 조각을 장식해 놓고 있다.
    더욱이 지붕 모서리 부분에 조각들(잡상)을 나열한 점은 침전 건축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특이한 구성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간결하게 장식한 익공 양식이며 구름과 덩굴문양으로 꾸몄다.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만들었고, 네면 모든 칸에 벽을 두르지 않고 창을 달아 놓았다.

    조선 후기 마지막 왕실 침전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덕홍전(德弘殿)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내외빈객들을 접견하던 건물로, 1911년에 건립되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의 하나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돌려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翼工)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으나,

    동쪽에 있는 함녕전보다는 작은 규모이나 기단고(基壇高), 축부(軸部), 옥개(屋蓋) 등의 비례가 세련돼 보인다.

    팔작지붕의 마루에는 양성(兩城)하고 귀마루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얹어 잡귀(雜鬼)와 화마(火魔)에 대비하고 있다.

    덕홍전은 덕수궁(德壽宮)의 편전(便殿)으로 원래 함녕전과의 사이에는 원장(垣墻)이 있었으나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덕홍전의 규모는 함녕전보다 작으나 편전(便殿)으로서의 모든 면모를 갖추고 있고,

    정면 3, 측면 4간의 팔작지붕 익공계(翼工系) 건물로 앞의 계단 설치가 다른 건물에 비해 특이하다.

    기단(基壇) 앞에 월대(月臺) 모양의 한 단 낮은 기단을 덧붙여 동서 양측에 디딤돌로 놓고

    중앙에 소맷돌로 갖춘 석계(石階)를 놓고 있다.

    원래 이곳 덕홍전 자리에는 한때 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으로 쓰이던 경효전(景孝殿)이 있었다.
    1904년 대화재 이후 경효전을 수옥헌(漱玉軒) 방면으로 옮긴 뒤, 1906년 지금의 덕홍전을 짓고 1911년 개조하였다.

    따라서 덕홍전은 덕수궁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나중에 지어진 건물이다.
    덕홍전의 용도는 주로 외국사신들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고,

    그런 까닭에 덕홍전의 내부 전체는 넓게 터져 있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내부 모양 또한 접견실의 모습 그대로다.
    또한 내부에는 대한제국 문장(紋章)인 봉황과 오얏꽃(李花) 문양 등을 화려한 금색으로 장식했음을 볼 수 있다.














    덕수궁 이야기


    덕수궁은 정릉동 행궁, 서궁, 경운궁 드으로 불리다가 고종이 퇴위된 후 덕수궁으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으로 평안도 의주로 몽진했던 선조가 환도한 후

    월산대군(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형)의 증손자 이성이 살던 집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덕수궁(德壽宮)


    덕수궁 터에는 월산대군(1454~1488)의 후손을 비롯한 왕족들과 고관대작들의 저택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이 집들을 수용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였다가

    광해군이 1611년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이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궁궐로서 큰 역할이 없다가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로 삼았고 많은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또한 근대화를 향한 고종의 의지에 따라 궁 안에 서양식 건물들을 세웠다.

    그러나 1880년대 정릉동 일대는 각국 외교사절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어서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기존의 미국, 영국, 러시아 영사관 사이로 궁역을 확장하다 보니 대지의 모양이 불규칙하게 된 것이다.

    1907년에 고종이 퇴위하면서 선황제의 거처가 되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으며,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전과 서쪽 증명전 일대도 매각되어 원래 넓이의 1/3만 남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심 부분과 몇 개의 양관(洋館)만 남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된 후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중심부인 중화전 일원과 정관헌 및 석조전과 같은 양관들이 남아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으뜸 궁궐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상징적 공간이었다.

    또한 전통 규범 속에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이며, 주변 상황의 공간적 맥락에 맞추어 조성한 도시적 궁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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