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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 연병호 생가(曾坪 延秉昊 生家) - 충청북도기념물 제122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2. 28. 04:30
증평 연병호 생가(曾坪 延秉昊 生家) - 충청북도기념물 제122호
이 집은 독립운동가 연병호(延秉昊, 1894~1963) 선생이 낳고 자란 곳이다.
선생의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순서(舜瑞), 호는 원명(圓明)이며, 초명(初名)은 병힉(秉學)으로
1894년(고종 31년) 11월 22일 연채우와 전주 이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그해 4월 국내로 잠입, 서울에서 이병철 조용주 안재홍 등과 함께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을 결성하여 활동하던 중,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사건에 연루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을 통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재차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한때 북경과 만주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상해로 와서 1922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29년 한국혁명당을 조직하였고, 1933년에는 신한독립당 선전위원장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에 참여하였으며,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그러나 1937년 1월 7일 중국에서 체포, 국내로 압송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초대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헌법기초의원으로 활동했으며,
2대 국회의원으로도 당선되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감찰관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63년 1월 25일 부인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내려왔으나, 다음 날 새벽 타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그해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당초 이 집은 연병호의 부친 연채우가 살던 초가 2칸 규모였으나, 선생이 손수 뒷산에서 재목을 잘라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하였다가, 198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1998년 지역주민들이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뜻을 모아 영당(影堂)과 삼문(三門)을 건립하였다.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산정길 21 (석곡리)
애국지사 고 연병호선생 생가(愛國志士 故 延秉昊先生 生家)
연병호 문패(延秉昊 門牌)
연병호선생 사당(延秉昊先生 祠堂)
명덕정사(明德精祠) - 연병호선생 사당(延秉昊先生 祠堂)
충북지사, 내무부장관, 6선 국회의원을 지낸 동헌 김종호(東軒 金宗鎬, 1935~2018) 선생이 썼다.
애국지사 연병호선생 공훈사(愛國志士 延秉昊先生 功勳史)
독립투사 연병호선생 추모비(獨立鬪士 延秉昊先生 追慕碑)
애국지사 연병호선생 추모비(愛國志士 延秉昊先生 追慕碑)
영당건립기념비(影堂建立紀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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