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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水原華城) 설경(雪景) - 사적 제3호
    수원사랑/수원화성(水原華城) 2019. 2. 20. 19:30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水原華城) 설경(雪景) - 사적 제3호










    수원화성 서포루(水原華城 西砲樓)

     

    수원화성의 서포루(西砲樓)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鋪樓)는 외관상 포루(鋪樓)와 비슷하지만,

    포루(砲樓)의 전형적인 모습은 화성(華城)에서 볼 수 있는데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만든 치성(雉城)위에 검정 벽돌로 쌓았으며

    나무 마루판을 3층으로 구획하여 군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건물을 세워 초소나 대기소와 같은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마루 아래 성벽 여장(女牆:담장)에는 여러 개의 총구멍(銃眼)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서포루(西砲樓)는 화성장대(華城將臺)로부터 북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화성에 있는 5개의 포루(砲樓)는 서포루(西砲樓)를 비롯하여 남포루(南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동포루(東砲樓) 등이 있다.








    수원화성 서노대(水原華城 西弩臺)

     

     

    노대(弩臺)란 누각이 없이 전돌을 쌓아 높은 대(臺)를 만든 시설물로 적의 공격을 항상 감시해서

     

    대(臺)와 성(城) 전체에 오방색 기로 신호를 하며 적이 근접했을 때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진지이다.

     

    쇠뇌는 사람의 힘으로 쏘는 화살보다 더 멀리 가며 많은 양을 한꺼번에 날릴 수 있다.

     

    화성에는 서노대(西弩臺)와 동북노대(東北弩臺) 등 2개의 노대(弩臺)가 있는데,

     

    서노대는 서장대(西將臺, 華城將臺) 옆에 팔각형으로 약 3m의 높이로

     

    여장을 쌓아 만들어져 있으며, 팔달산 정상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노대의 형태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특징이 있다.

     

    이것은 바깥의 적의 동태를 살피고, 성 안의 군사에게 밖의 사정을 알릴 수 있는 시설물로

     

    이곳에 오르면 성밖의 서쪽이 한눈에 들어오며 적으로부터 군사 지휘소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수원화성 화성장대(水原華城 華城將臺)

     

    수원의 중심부에 위치한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화성장대는

    1794년 1월에 조선 정조대왕께서 팔달산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핀 다음

    "이곳은 산꼭대기의 가장 높은 곳을 골라 잡았으니 먼 곳을 살피기에 편리하다.

    기세가 탁 트였으니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장대(將臺)라고 이를 만하다."고 하여 착공되었다.
    화성장대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화성의 완급과 사방을 한눈에 살필 수 있고,

    팔달산을 둘러싸고 있는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앉은 자리에서 사병을 제어할 만하다.

    1795년(정조19년)에 정조(正祖)는 팔달산(八達山) 정상인 화성장대에 올라

    친히 성조(문을 열고 닫는 의식)와 야조(야간군사훈련)을 지휘하였다.

    화성의 서쪽에 있는 장대라 하여 "서장대(西將臺)"라고도 한다.










    효원(孝園)의 종각(鐘閣)



    수원화성 서포루(水原華城 西鋪樓)

     

    포루(鋪樓)는 성의 치성(雉城)위에 지은 누각(樓閣)으로

    성내에서 이동하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초소나 군사대기소를 말하며,

    서포루(西鋪樓)는 화성장대(華城將臺)의 남쪽에 위치하여 성 밖으로 약 7m 돌출되었고

    누각에는 판문이 설치되어 있고 전안을 두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나 동측면은 1칸으로 된 중층이다.

    건물 내면은 나무사다리를 사용하게 되어 있으며, 민도리 5량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화성의 서쪽을 조망하는데 유리하도록 가장 높은 곳에 지었고

    가급적 멀리 보기위해 계단을 놓아서 높은 누각을 지었으며 1796(정조 20) 8월 18일에 완공하였다.

    서암문이 적에게 발각되어 공격받는 것에 대비하여 설치되었다.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鋪舍)

     

    암문(暗門)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비밀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양식, 무기 등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이 문은 용도(甬道: 담을 양쪽으로 쌓아 만든 길)의 출입문이기도 하다.

    5개의 암문 중에서 유일하게 포사(鋪舍)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796년(정조 20년) 8월 6일 홍예가 완성되었다.

    포사(鋪舍)는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위급신호를 전달하였다.

    서남암문(西南暗門) 및 서남포사(西南鋪舍)는 화성의 서남쪽 서남각루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서남각루(西南角樓),화양루(華陽樓)
     
    서남암문을 나서면 나타나는 용도(勇道)라는 좁다랗고 긴 성곽을 지나면 용도끝에 포루가 하나 섰는데
    적의 접근로로 예상되는 곳에 적과 종심으로 길게 성곽을 내어 쌓아 적을 분산시켜 공격하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각루는 성곽의 돌출된 요지 중 비교적 높은 위치에 누각을 세워서 성곽주변을 감시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물이다.
    서남각루는 일명 화양루(華陽樓)라고 하여 서남암문 밖 외성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의 높은 지점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전락적 요충지로 전망이 매우 좋다.
    서남암문에서 이곳까지 이어지는 통로를 용도라고 부르며 통로 좌우측에는 치가 각 1개씩 설치되어 있다.
    서남각루는 일명 '화양루'라고도 불리는데 서장대와 팔달문의 중간지범 산기슭에 서남암문에서 용도를 통하여
    뻗어나간 외성의 끝부분에 위치해 있다.
    화양이란 화성의 남족이란 뜻이며, 서남각루는 용도 끝에 위치하여 화성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수원화성 남포루(水原華城 南砲樓)

     

    포루(砲樓)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치섬과 유사하게 축조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그 안에 화포 등을 감추어 두었다가

    위. 아래와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성곽시설물 중에서 가장 중무장된 시설이라 할 수있다.
    화성에는 벽돌로 사용하여 남포루(南砲樓)를 비롯하여 서포루(西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동포루(東砲樓) 등 모두 5개의 포루를 만들었는데, 서포루만 약간 작고 4개의 포루는 동일한 규격이다.

    포루는 3층으로서 지대 위에 혈석(穴石: 대포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을 전면 2개, 좌우 3개씩 놓았다.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하였으며, 총혈 15개를 만들었다.

    지대 위에 뚫은 혈석은 포루(砲樓)에서만 볼 수 있는 시설이다.

    상부에 문루 3칸을 만들어 총안과 전안을 뚫어 놓았고, 문루 바깥 면에는 짐승그림을 그렸다.

    처마는 납도리 홀처마에 우진 각지붕이다.
    남포루는 팔달문에서 화양루(서남각루)에 이르는 방어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현재 팔달산 남쪽 중턱의 팔달문과 서남암문 사이에 위치해 있다.

    남포루는 1796년 7월 9일에 완성되었으며 만드는데 3,203냥의 비용이 들었다.










    수원화성 팔달문(水原華城 八達門) - 보물 제402호

     

    수원(水原) 팔달문(八達門)은 보물 제402호로, 수원화성의 남문(南門)이다.

    문루의 규모는 높이 9m, 너비 25m로, 누상에 종(鐘)이 걸려 있다.

     수원 화성은 정조(正祖) 18년(1794년)에 이궁(離宮)으로 축성되었다.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 서양문화의 영향을 반영한 점이 중요한데,

     이는 전축(塼築)의 보루 같은 구조 면에서나 건축기계 면에서 실측할 수 있다.

    흥인문에서와 같은 옹성을 앞쪽에 두고 역시 위에는 총안(銃眼)을 뚫었다.

    전면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검정벽돌로 쌓았는데,

     이는 성문에 접근하는 적군을 뒤쪽에서 공격하기 위한 시설로

     성문 앞으로 길게 반원형으로 빼어낸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水原華城) 설경(雪景) - 사적 제3호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침(陵寢)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華城籌略, 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총괄아래 조심태(趙心泰, 1740~1799)의 지휘로

    1794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5,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었다.

    (남수문 20126월 복원 완료)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 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 화서문(보물 제403), 장안문,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 방화수류정(보물 제1709)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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