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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겸재 정선선생의 작품 감상하기(겸재정선미술관)
    국내 나들이/미술관(美術館) 2019. 3. 20. 05:54

    겸재 정선선생의 작품 감상하기(겸재정선미술관)



    금강내산(金剛內山)


    금강내산은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안에 합장된 21면의 그림 중 한 폭이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36세부터 그려 온 내금강총도(內金剛總圖)가 이 그림에서 완성되었다.

    금화에서 금성을 거쳐 내금강으로 들어가려면 단발령을 넘어야 하는데 그곳에 올라서면 비로봉을 주봉으로 하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백색화강암 암봉들이 마치 한 떨기 하얀 연꽃송이처럼 눈앞에 떠오른다고 한다.

    그 감흥을 겸재는 부감하는 시각으로 포착하여 내금강 전경을 한 화폭 안에 담아내었다.

    비로봉을 정점으로 내금강 12천 색화강암봉을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 놓아 막 피어나는 백련꽃 봉오리처럼 화면을 구성했는데

    토산이 서릿발 같은 백색 화강암봉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그 산자락을 따라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같은 사찰과 묘길상, 만폭동 등의 명승지를 세세하게 배치하여

    금강산의 진면목을 남김없이 표현해 내었다.



    귀거래(歸去來)


    귀거래도(歸去來圖)는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

    41(405)13년간의 관리생활을 그만 두고 고향인 강서성(江西省) 심양(瀋陽)으로 돌아갈 때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귀거래도(고향으로 귀향하는 그림)는 조선시대 지식층의 문민들, 선비들, 화원들이 즐겨 그린 그림이다.

    겸재정선미술관에도 귀거래도와 관련이 있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문정부이전로도(問征夫以前路圖),

    운무심이출수도(雲無心而出岫圖), 무고송이반환도(撫孤松而盤桓圖) 세 폭의 시리즈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귀거래도에서 인물보다 배경인 자연을 크게 강조하거나

    새롭게 표현하는 방법 등을 택하여 자연과 합일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겸재 정선이 조선시대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에서 한가롭게 소요하는 삶을 원하여

    귀거래도에 자신을 의탁해 세속에서 벗어난 고결한 삶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겸재정선미술관 소장 겸재 정선의 귀거래도(歸去來圖) 가운데

    1폭은 도연명이 소나무 아래 앉아서 멀리 산골짜기에서 솟아오르는 구름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경쾌한 필선으로 간단하게 그려진 주산과 송림 등이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화면 상단에 운무심이출수(雲無心而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른다.)란 화제(畵題)가 적혀 있다.

    2폭인 무고송이반환(撫孤松而盤桓, 홀로 서 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다.)은 동산 위에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소나무를 어루만지고 서 있는 도연명이 묘사되어 있으며, 소나무는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르며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3폭인 문정부이전로(問征夫以前路, 나그네에게 앞길을 묻는다.)는 나귀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연명을 그린 것이다.

    도연명이 지나가는 행인에게 고향이 얼마나 먼가를 물어 보고 있으며, 행인은 그가 가야할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행인이 가리킨 곳은 산들이 중첩되어 있어 아득히 먼 곳임을 암시하고 있다.



    운무심이출수(雲無心而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른다.)




    문정부이전로(問征夫以前路, 나그네에게 앞길을 묻는다.)




    무고송이반환(撫孤松而盤桓, 홀로 서 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다.)




    총석정(叢石亭)


    북한 지역인 강원도 통천군에서 동해변을 따라 동북쪽으로 7km쯤 올라가면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총석정이 나온다.

    이곳 총석정은 바다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고 있는데, 오랜 풍화작용으로 6~8각형의 기이한 돌기둥의 모습을 띄고 있다.

    만 아니라 이곳 총석정은 동해의 장쾌한 바다를 배경으로 용솟음치듯 높이 치솟는 포말이 돌기둥을 때리는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관동팔경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경지(景地)로 대접받고 있다.

    조선시대 많은 문인, 화가들이 이와 같은 총석정의 절경을 찬미하고 화폭에 담아냈다.

    화가들 중에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을 비롯한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유춘 이인문(有春 李寅文),

    소당 이재관(小塘 李在寬),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등이 특히 총석정을 즐겨 그렸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겸재 정선의 총석정도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등의 총석정도가 돋보이며,

    이외에도 여러 점의 총석정도가 아름다운 절세의 전설을 전해주고 있다.

    겸재정선미술관 소장의 총석정도 역시 크게 돋보인다.

    겸재 정선의 시선을 따라 화폭을 살펴보면 일단 정자가 세워진 언덕, 소나무, 파도, 바위 등의 주제부가 또렷하게 보이고

    화폭 오른쪽이 바위산으로 채워진 것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비어 보이는 왼쪽 하단을 파도로 처리한 것,

    그리고 화면 왼쪽 상단에 '총석정(叢石亭)''겸재(謙齋)'의 관서, 백문방인으로 균형을 맞춘 것이 아주 인상적이다.

    이밖에도 치밀한 화면 구성과 겸재 특유의 힘찬 수직준법, 한 쪽으로 치우쳐 찍은 점(편필),

    그리고 먹의 농담(濃淡)이 세련되고 생동감 있게 드러나 있으며,

    화면의 크고 작은 3개의 돌기둥에 감도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거친 파도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청풍계(淸風溪)


    청풍계(淸風溪) 인왕산 동쪽 기슭 현재의 청운동과 그곳 주변을 말한다.

    광화문에서 부암동 쪽으로 가다 자하문 터널 못 미쳐 나오는 청운동이 바로 조선시대의 청풍계이다.

    청풍계는 백악산과 인왕산을 양쪽으로 걸쳐 있으며, 경복궁 서쪽 일대를 일컫는 '서촌'을 비롯한

    청운초등학교, 경복고등학교, 경기상업고등학교 등 세 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경관이 무척 아름다운 곳으로 조선시대 한양의 명승지 중 하나였다.

    청풍계는 푸른 단풍나무가 있는 계곡이란 뜻을 담고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으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어지고 있다.

    또한 오늘날의 청운동이란 명칭은 일제강점기 때 청풍계와 백운동이 합쳐져서 붙여졌다.

    이를 추적해보면 청풍계는 깊숙하고 그윽한 계곡에 맑은 수석이 특히 인상적이었고

    백운동은 산은 높지 않으나 골짜기의 푸른 송림 사이로 흐르는 맑은 냇물이 아주 매력적이어서

    옛날부터 많은 문인,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청풍계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고려대학교박물관, 겸재정선미술관 등에 다수 남아있다.

    겸재 정선의 청풍계도는 시리즈는 장소와 시야 그리고 세로로 긴 구도가 거의 동일하게 보여 진다.

    특히 측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뾰족한 바위와 나무가 짙은 먹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다른 그림들과 비교되어지는 큰 특징이며, 어김없이 사당과 정자,

    그리고 초가지붕의 집 등이 등장하고 있는 것 또한 특징 중 하나이다.

    겸재정선미술관 소장의 청풍계도 역시 겸재 정선이 그린 많은 청풍계도와 구도와 시야,

    바위와 나무, 정문(旌門)과 정자 등이 서로 비교될 만하다




    산수(山水)


    화폭 근경의 좌측 둔덕에는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몇 그루의 나무와

    그 아래 잠시 비바람을 피해 머물고 있는 쪽 배와 안에 어부가 크게 부각되어 있다.

    화폭의 넓게 자리를 차지한 수면은 근경으로부터 원경까지 시원하게 펼쳐져 있으며 원경의 산은 실루엣처럼 아득하게 처리되어 있다.

    여기에 비바람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듯 먼 곳을 응시하는 어부의 시선을 통해 화면은 더욱 확장되어 보여 진다.

    표현기법에 있어서 주목되는 것은, 일필로 과감하게 처리한 근경의 나무들과 실루엣처럼 보이는 원경의 산,

    미점으로 처리한 나뭇잎과 바람에 몸을 맡긴 버들가지, 간결한 필치로 처리된 출렁이는 물결과

    그 물결을 응시하고 있는 쪽배 안의 어부 등에서 겸재 정선의 활달한 필치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화첩의 일부였을 것으로 보이며, 화면 상단 오른쪽에 나중에 쓴 것으로 보이는 '謙齋' 겸재의 관서와 백문방인이 찍혀있다.

    바람이 부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시원하고 여유 있는 느낌과 서정적이고 사의적인 성격이 잘 전해지는 겸재 정선의 산수도는

    인생관이나 자연관과 비교, 인생을 보다 넓고 깊게 확장시킬 수 있는 격조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조어(釣魚)


    조선시대 선비들은 '출처지리(出處之理)'의 뜻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하고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로 여겼다.

    출처란 국가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실현 시키고자 하는 의지로 관()에 나아가는 것을 ()’이라 하고,

    정의와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면 을 떠나 자연 속에 은거하여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것을 ()’라 하였다.

    조어도는 이와 같은 출처지리에 대한 이상을 낚시하는 모습에 비유하여 그린 그림이다.

    보기엔 그저 선비가 낚시하고 있는 모습의 그림일 뿐이지만 때를 만나면 세상에 펼쳐 보겠다는 강한 의지의 뜻과 함께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남몰래 준비하는 사람으로 비유되어 왔다.

    겸재 정선의 조어도는 삿갓 쓴 한 선비가 천운과 때를 기다리며 작은 쪽배에 앉아

    낚싯대를 물에 드리운 채 자연의 모든 것들과 교유하고 있는 장면의 그림이다.

    화폭 왼쪽 위태로운 절벽에서 나무 한 그루가 아주 힘차게 뻗어 나와 있고,

    그 아래로 자주색 옷을 입은 선비가 쪽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물끄러미 수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 드리워져 오는 어둠에 갈대가 바람에 살랑대고 그 사이에서 두 마리 기러기가 날아오르고 있다.

    그림 오른쪽 하단에는 자줏빛 옷을 입고 낚시를 드리우니 강의 기러기가 등 뒤에서 나르네.

    (紫衣垂釣 江雁背飛 烟客評)’라는 연객(烟客) 허필(許佖, 1709~1761)의 품평이 적혀 있다.




    피금정(披襟亭)


    조선시대 선비들의 최대 풍류는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시()와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선비들이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려면 의정부, 포천, 철원, 금성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야 했고

    이곳을 지나면 반드시 남대천변(南大川邊) 큰길가를 거쳐야 했는데 피금정은 바로 그곳에 위치하였다.

    피금정은 금성(지금의 금화군)에 있는 정자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에 옷깃을 풀어 젖히는 정자'란 뜻이 담겨 있다.

    그만큼 피금정과 그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서 금강산을 유람하는 객들이 지나가던 중 어김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피금정은 그 자체로 격조가 있고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주변으로부터 거의 5리 길이나 우거져있는 울창한 가로수 숲이 아주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 화가들이 금강산을 그림으로 남기면서 빠뜨리지 않고 그렸던 명소 중 하나가 되었다.

    겸재 정선의 피금정도는 하단, 중앙, 상단의 분명한 삼단구도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에는 남대천을 건너 피금정으로 들어가려는 일행이 보이고

    중앙에는 줄지은 수양버들과 소나무, 활엽수 등 울창한 숲과 함께 그 사이로 피금정이 보인다.

    상단에는 넓게 펼쳐진 흰 안개구름과 그 위로 금성의 진산(鎭山)인 경파산(慶坡山)이 주변 산들을 거느리면서 장엄함을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겸재는 화폭에 넓은 공간의 경물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표현했다.

    화폭 상단 왼쪽에는 영조시대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연객(煙客) 허필(許佖, 1709~1761)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의 한시(漢詩) 한 구절

    골짜기의 빛은 깊어 저문듯하고 마을 모습은 고요하여 잠자는 것 같네(峽色深如莫 邨容静若眼)”를 인용하여 평해 놓았다.




    청하성읍(淸河城邑)


    청하성읍도는 겸재 정선이 지금의 포항시에 속하는 청하의 현감을 지내면서

    그 곳 성읍의 경관을 동쪽 봉선정(월포리 가는 쪽에 위치)에서 바라보고 그린 것이다.

    자신이 근무하는 관아를 화면의 중심에 두고 근경에는 갯벌과 솔밭을 그려 넣었으며,

    원경에는 호학산(呼鶴山), 천령산(天嶺山), 내연산(內延山)을 병풍처럼 펼쳐놓아 청하읍성을 한 눈에 보이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근경 우측의 솔숲은 청하성읍을 자랑하기 위해 그려 넣은 것처럼 보이며,

    중경 중앙의 솔숲은 이곳은 신성한 곳이다라고 힘주어 말하며 청하성읍을 수호하고 있는 듯 서있다.

    화면 중앙 분지에는 한길 넘는 성벽이 사방으로 청하현 관아를 지키고 있다.

    이와 함께 성벽 곳곳에는 잎줄기가 긴 회화나무(吉祥木, 길상목)가 큰 인물이 나오길 소망하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바람을 타고 있다.

    그리고 성벽 주변에는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화면 오른쪽 고개와 언덕에는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을 한 집들이 여러 채 모여 가까운 이웃임을 자랑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화면 상단 화제 옆 千金勿傳(천금물전)’이라 찍혀진 백문방인조차도 청하성읍도가

    자손대대로 소중하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제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렇듯 청하성읍도는 어느 것 하나 소외되지 않으며 모든 것들이 화면 전체 구도에 관여하고 있다.

    화면에서 느껴지는 바람마저도 원경의 솔숲을 휘돌아 먼 바다로 나아가는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현재 청하현아는 터만 남아 있으나 청하현아가 있었던 자리에는 청하초등학교와 면사무소가 들어서 있고

    현아 내 회화나무 중 한 그루만이 청하면사무소 마당에서 지금까지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설경산수(雪景山水)




    산수기려(山水騎驢)




    겸옹(정선)의 그림은 우리나라 제일이다.

    권 가운데 그림도 모두 득의작이다 옹은 지금 늙어 다시는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으니

    더욱 보배로 삼을 만하다 감탄하며 감상한 나머지 한 마디 적는다.


    (謙翁之畵 當爲吾東第一 卷中所畵 亦皆得意 翁今老矣 不可復得意, 尤可寶也. 歎賞之餘, 爲題一語. 豹菴)

    (겸옹지화 당위오동제일 권중소화 역개득의 옹금로의 불가부득의, 우가보야. 탄상지여, 위제일어. 표암)


    표암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정선의 그림을 감상하고 남긴 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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