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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종복위운동 성지(端宗復位運動 聖地) - 금성대군신단(錦城大君神壇)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7. 25. 04:30

    단종복위운동 성지(端宗復位運動 聖地) - 금성대군신단(錦城大君神壇)


    금성대군신단이 있는 이곳은 순흥안씨(順興安氏)의 관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으로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고고한 학문이 서려 있는 선비의 고장이다.

    이곳 금성단(錦城壇)은 사묘(祀廟)와 제단(祭壇 2,654)으로 금성대군(錦城大君)을 기리는 곳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이름은 유()로 조선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이었으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고,

    단종(端宗, 조선 제6대 왕)의 숙부이자 세조(首陽大君, 世祖:조선 제7대왕)의 동생이다.

    1433(세종15) 여덟 살 나이에 금성대군으로 봉해졌으며

    서른이 되던 해인 1455(세조 1)에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으로 부터 왕권을 찬탈하여 왕이 된

    둘째 친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 세종의 둘째아들)에게 대항하다가 

    모반혐의로 삭녕에 유배되었다가 경기도 광주로 이배되었다.

    1456(세조 2)에는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사육신들이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이곳 순흥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이곳에서 다시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가 기천 현감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1457(세조 3) 이 사건으로 단종과 금성대군은 사사되고 순흥부는 폐부가 되었으며,

    역모에 동참한 혐의로 수천 명을 죽여 그 시체를 소수서원 앞 죽계천(竹溪川) 수장했는데,

    그들의 피가 냇물을 따라 15리 가량이나 흐르다 끝난 곳을 지금도 "피끝마을"이라고 하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70번지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 - 정축지변(丁丑之變)


    조선 단종의 복위를 위해 일으켰던 거사를 이르는 말로서.

    1453(단종 1) 10월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1455년 윤 6월에는 자신의 추종세력인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 등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었으며,

    단종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게 하고. 계유정난 직후에는 김종서의 당여(黨與)로서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있던

    이징옥(李澄玉)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으나 민심을 크게 자극됐다.

    한편, 세조의 왕위찬탈은 과거 세종·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의 일부 학사 출신으로부터

    심각한 저항을 받았는데(사육신 등유신(儒臣)들은 무관인 유응부(兪應孚성승(成勝) 등과 함께

    세조(世祖)를 제거하고 상왕(단종)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45510(세조 1) ()나라의 책명사(册命使)가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를 계기로

    145661일 창덕궁(昌德宮)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 때 거사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마침 이날 세조 제거의 행동책을 맡은 별운검(別雲劍)이 갑자기 폐해져서 거사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거사계획이 탄로되었음을 두려워한 김질(金礩)이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거사계획을 누설하고,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함으로써 거사 주동자인 사육신(死六臣)과 그외 연루자 70여 명이

    모두 처형되면서 단종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세조는 이 사건 직후 유신들의 중심기관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經筵)을 중지하였으며

    새로운 유신들을 발탁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단종의 능은 유배되어 사사된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이고,

    어린 조카의 왕권을 찬탈하고 죽인 세조의 능은 경기도 남양주의 광릉(光陵)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瑜). 호는 승은정(承恩亭).

    아버지는 세종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단종의 숙부이다,

    1433(세종 15)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했으며,

    그 해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이방번(李芳蕃)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1452년에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와 함께

    사정전(思政殿)에서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왕의 보필 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세종대왕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했다.

    1455년 왕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몇몇 종친과 함께 무사들과 결탁해 당여를 키운다는 죄명을 받고,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그 해 수양대군이 단종을 핍박해 왕위를 선양받았다.

    1456(세조 2)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결과 여기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寧越)로 유배되었다.

    이때 금성대군도 삭녕에서 다시 경상도 순흥(順興)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순흥에 안치된 뒤,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해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에 관노(官奴)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해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되는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그 뒤 1739(영조 15)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에

    육종영(六宗英: 안평대군 외 6인의 종친에게 神主配享을 내린 일)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靑安)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금성단(錦城壇) 전경


    위 재단의 배치는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중앙 제단(祭壇)에 모시고,

    이보흠(李甫欽)을 오른편에  무명의 의사들은 모셨으며 순의비(殉義碑)가 있어 해마다 봄. 가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순의비(殉義碑)


    제명조선단종조충신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齊明朝鮮端宗朝忠臣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순의비(殉義碑)의 높이는 1.4m, 55cm, 두께 24cm이다.





    금성대군지위(錦城大君之位)



    좌측 제단의 제의사지위(諸義士之位) 전경


    정축지변(丁丑之變) 참여했던 무명의 선비들을 추앙하기 위한 제단이다.




    우측 제단의 부사이공보흠지위(府使李公甫欽欽之位) 전경 - 순흥부사
















    단종애사(端宗哀史) 대군길(大君路)


    단종복위의거를 주도하다가 희생된 절의(節義)의 상징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

    정축년의거(1456)로 인해 순흥은 도호부가 폐지되고 초토화 되었다.

    하지만 지역민들은 그를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금성대군 신단을 설치하여 제향하고

    성황제를 통해 그의 충정을 민간신앙으로 승화 시켰다.

    의거로 희생된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던 죽계의 물줄기를 따라

    피끝에서 금성대군신단에 이르는 길을 걸으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충절의 역사를 되새긴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 - 사적 제491호


    조선 세조 2(1457)에 세종의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이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순흥(順興)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 및 고향의 유림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순절하게 되는데,

    이곳은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마련된 제단이다.

    단종 복위가 실패하자 순흥부는 없어졌다.

    그 후 숙종 9(1683)에 순흥부가 복원되고순절 의사의 원한이 풀리자 숙종 19(1693)에 부사 정중창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 당했던 자리에 처음으로 단을 쌓았고,숙종 45(1719)에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삼단으로 고쳐 쌓았다.

    그 후 영조 18(1742)에 경상감사 심성희가 서쪽으로 30~40보 옮겨 단소를 정비하여 순의비(殉義碑)를 세우고,

    관리사를 지어 매년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오고 있다.


    위리안치(圍籬安置) : 귀양을 간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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