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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견새 우는 청령포 노래비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9. 9. 12. 05:30

    두견새 우는 청령포 노래비



    두견새 우는 청령포 노래비



    두견새 우는 청령포


    작사 이만진

    작곡 한복남

    노래 심수경


    1. 왕관을 벗어놓고 영월땅이 웬말이냐,

    두견새 벗을 삼아 슬픈노래 부르며,

    한양천리 바라보고 원한으로 삼년세월,

    , 애달픈 어린임금 장릉에 잠들었네.


    2. 두견새 구슬프게 지저귀는 청령포야,

    치솟는 기암절벽 구비치는 물결은,

    말해다오 그 옛날의 단동대왕 귀양살이,

    , 오백년 그 역사에 비각만 남아있네.


    3. 동강물 맑은 곳에 비춰주는 달을 보고,

    님 가신 뒤를 따라 꽃과 같이 사라진,

    아름다운 궁녀들의 그 절개가 장하고나,

    , 낙화암 절벽에는 진달래 피고 지네.

     




    연군의 단장곡(戀君斷腸曲)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맘 같아야 울어 밤길 애닯다


    이 시조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 ?~?)이 세조의 명을 받고

    단종을 강원도 영월까지 유배지에 호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허탈한 그의 마음을 달랠길 없어 유배지 청령포를 굽어보는 서강 강변 언덕에 앉아,

    그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연군의 단장곡(戀君斷腸曲)’이다.


    이 시조에서 그는 참혹한 권력의 희생양이 된 단종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과 서러움을 절절이 표현하면서,

    동시에 부도덕한 정치권력으로 부터 어린 임금을 보호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애통하는 회한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단종을 유배지 청령포까지 압송한 자신의 임무가 그에게는 한없이 원망스러운 일이었다.

    이렇듯 단종에 대한 애틋함으로 괴로워하는 그에게 무자비한 임무가 또 한 번 주어진다.

    금부도사인 왕방연에게 단종을 사사(賜死)하라는 사형집행관 임무가 그것이었다.

    감히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무거운 발걸음으로 청령포에 도착하였지만,

    무슨 일로 왔느냐는 端宗(단종)下問(하문)에 차마 사실대로 아뢰지 못하고 마당에 엎드려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이에 수행하였던 羅將,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으니 속히 집행할 것을 재촉하였으나 그는 계속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홀연히 이 일을 자청하는 자가 있었다다름아닌 공생(貢生)이였다.

    그 자는 활시위에 긴끈을 이어 단종의 목에 걸고 뒷문에서 잡아당겨 단번에 보란듯이 단종을 목졸라 죽였다.

    14571024, 魯山君(단종)의 나이 17세때의 일이다.

    貢生, 그 자는 평소 청령포에서 심부름과 잡다한 일로 항상 단종을 모시던 자였다.

    그런 자가 평소 정성껏 모시던 주군을 솔선하여 직접 자기 손으로 絞殺(교살)한 것이다.

    세조로 부터 사사의 임무를 하명 받은 의금부도사 조차도 사태가 너무도 황망하여 감히 집행을 못하던 상황에서,

    개 공생 따위가 주군을 배신하여 감히 자신의 상전을 처형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오늘 날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  





    단종대왕 유배길


    소요 일수 : 7,

    거리 : 700(280km)


    창덕궁(昌德宮) 영도교(永渡橋) 살곶이 다리(箭串橋) 화양정(華陽亭) 광나루(廣津)

    배알미리(拜謁尾里) 이포나루(梨浦) 원통고개 어수정(御水井) 서원리 안창마을 문막(文幕)

    서원말 순곡리 단정지(端亭址 땟재 귀래면 운남리(貴來面 雲南里) 운학동 구렁재 신림(神林)

    싸리치 황둔(黃屯) 솔치재(松峙) 어음정(御飮井) 역골 주천3층석탑 주천(酒泉)사거리 쉼터

    군등치(君登峙) 뱃말 배일치마을(拜日峙村) 배일치재 옥녀봉(玉女峰) 선돌 청령포(淸泠浦)


    여기 청령포에서 2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영월읍내에 있는 영월객사(관풍헌)로 옮겨져 유배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영주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흡과 함께 논의하기를 '세조를 제거하고

    유배 중인 상왕(단종)을 임금으로 모시자' 하여 만들게 된 격문이 고변되어 역모 혐의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세조의 신하들은 '노산군이 살아있기에 역모사건이 또 일어난 것이니 사사시켜야 합니다'라는 상소문을 연달아 올리자

    세조는 '아니 된다'라고 반복하였는데 '금성대군과 송현수(단종의 장인)를 역모혐의로 사사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

    노산군이 놀라서 자결하였다'고 조선왕조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733년 영조대왕은 단종대왕의 능인 장릉에 표석(능비석)을 세우면서 앞면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 하고,

    뒷면에는 1457년에 단종대왕이 영월군에 계셨는데 1024일 승하하셨으니 나이 17세이셨다'로 기록되어 있어

    죽음에 이르게 된 내력은 실록에도, 능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

    단지 실록과 장릉 표석에서 승하하신 날짜의 차이가 3일이나 된다.

    단종대왕은 영월 땅에서 1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나, 청령포와 장릉은 격동의 세월을 간직한 조선국 역사의 현장으로서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청령포(淸泠浦)

    앞은 강이요, 뒤는 절벽뿐이나 그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가슴 아픈 단종대왕 유배지

     

    노산군 유배지 청냉포(淸冷浦)

    상왕 노산이 사육신역모사건에 우두머리라 하여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지가 결정되어 2달여 머물러 계셨기에 노산군 유배지 청냉포이었다.


    단종대왕 유지 청령포(淸泠浦)

    1698년 숙종 24년에 단종대왕으로 복위된 이후부터는 단종대왕 유지 청령포가 되었다. 1

    726년 영월부사 윤양래가 청령포금표를 세우면서 선왕이 계시던 곳을 차다고 하는 냉()자는 합당치 않다하여

    청령포로 땅의 이름이 변화되었다.

    1763년 영조대왕의 친필 단묘재본부시유지 지명 청령포(端廟在本府時遺址 地名 淸泠浦) 표석이 세워져 있다.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한지 7일만인 음력 628(양력 718) 노산군(단종대왕)

    그 일행은 곤하고 긴 유배행렬을 마치고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이곳 청령포는 3면이 푸른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 한 면 만이 칼처럼 날카로운 산(도산)’

    층암절벽과 연결되어 있어 그야말로 천연감옥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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