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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감찬 장군 기마동상(姜邯贊 將軍 騎馬銅像)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9. 9. 21. 20:30

    강감찬 장군 기마동상(姜邯贊 將軍 騎馬銅像)










    강감찬 장군 기마동상 건립 경위(姜邯贊 將軍 騎馬銅像 建立 經緯)


    우리 고장 관악이 낳은 역사적 인물은 단연 인헌공 강감찬 장군이시다.

    구국의 명장 강감찬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을 널리 전파하고 선양하기 위하여

    이곳에 장군의 동상을 세우기로 초대 관악구의회에서 처음 제기되었으나 재원 마련이 어려워

    민선 구청장 취임 후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추진을 유보하여 왔다.

    초대 민선 구청장 취임 후 처음 맞은 제8회 인헌제(199510)에서 강감찬 장군 동상 건립을

    민간주도로 추진하기로 하고 관악문화원 내에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나,

    정부의 기부금품모집규제법의 발효로 다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어 구의회와 협의한 후 서울특별시장에게 건의하여

    사업비 전액을 지원받아 세계적인 규모의 기마동상을 이곳에 건립하게 되었다.

    호국정신의 상징인 이 동상이 60만 관악구민은 물론 우리 민족의 존경과 긍지로 후대에 길이 보존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이 동상은 조각가 김영중 선생이 제작하고 비명(碑銘)은 한글학자인 문학박사 한갑수 선생이 찬하였으며,

    글씨는 서예가인 문학박사 송하경 선생이 수고하셨다.


    서기 19971018일   관악구청장 진진형




    인헌공 강감찬장군 약전(仁憲公 姜邯贊 將軍 略傳)


    인헌공, 강감찬(서기 1948~1031) 장군은 우리 오천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장군 중의 한 분이다.

    장군은 고려 정종3년 봉천동에서 삼한박상공신 궁진(弓珍)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까지 지냈으나 학자로서보다는 무인으로서 재량을 발휘하였고,

    저서로는 '구선집(求善集)'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당시 고려는 친송배요(親宋排遼) 정책 때문에 요나라(거란,契丹)의 침입이 잦았는데,

    특히 현종 원년(1010)에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때 조정에서는 굴복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장군은 홀로 항전을 주장하면서

    전략상 일시적인 후퇴와 설득을 통하여 적을 물러나게 하여 크게 국위를 떨쳤다.

    다시 현종 9, 거란 10만 대군이 침입하자 장군은 상원수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정예기병 12천명을 산기슭에 잠복시킨 뒤,

    적을 앞뒤로 공격하여 도망가는 적을 귀주에서 섬멸함으로써 살아간 자가 수천에 불과하였다.

    이 싸움이 유명한 귀주대첩(龜州大捷)이다.

    이 승리는 거란의 야먕을 꺾어버리고 동북아시아 3국의 평화적인 관계를 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장군의 업적은 당시부터 추앙받아 왔으며, 민족의 영웅으로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강감찬 장군(姜邯贊 將軍)의 약사(略史)


    948년 금천(衿川)에서 출생(서울 관악구 봉천동 218-9) 초명 은천(殷川), 뒤에 이름을 고쳐 감찬(邯贊)이다.

    98336세에 문과에 장원급제

    101063세에 예부시랑(禮部侍郎, 현 차관급)에 오름, 거란 40만 격퇴,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朝臣)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01164세에 중추사(中樞使) 이부상서(吏部尙書, 현 내무장관)

    101871세에 거란 소배압(蕭排押) 10만 대군 격파, 안국공신(安國功臣) 호 제수

               거란의 소베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8,300명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뒤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食邑)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73세에 벼슬에서 물러 남, 성남(城南, 성의 남쪽) 별장에 한거하며 저술에 전념

    103083세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에 봉해졌다.

               저서에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

    103184세에 별세, 인헌(仁憲)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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