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공세리성지성당(貢稅里聖地聖堂)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20. 4. 23. 04:30


    공세리성지성당(貢稅里聖地聖堂)


    1890년에 시작된 12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공세리성지성당

    충청남도기념물 제144호로 높은 언덕에 우뚝 서있는 근대 고딕식 조적조 종교건물로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수려한 자연 경관과 잘 어우러져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명성답게 독특한 매력과 아름다운 자태를 맘껏 뽐내고 있다.

    공세리 성당의 아름다움은 이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성당이 위치한 1만여평의 부지는 성종 9(1478)부터 영조 38(1762)까지

    300년 동안 운영되었던 충청도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저장하던 공세 창고지인 역사 유적지이기도 하다.

    공세리 성당이 위치한 이곳은 내포지방의 입구로써 내포지역은

    한국천주교회의 신안의 못자리라 불릴 만큼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중심지였다.

    공세리성당에는 1801~1873년 신유, 병인박해 때 이 지역에서 순교하신 32위의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는 순교성지이기에 더욱 경건하고 의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공세리성당은 1890년 프랑스 외방선교회 파스키에 신부님에 의해 예산 간양골에서 시작되어

    그후 5년 뒤인 에밀 드비즈(파리 외방선교회) 신부님에 의해 지금 이 자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드비즈 신부님은 이곳에서 많은 일들을 하시는데, 특이할 만한 업적 중 하나는

    우리에게 이명래 고약으로 알려진 바로 그 고약의 원 개발자였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고약을 만들어 무료로 나누어주는데,

    그 비법을 당시 드비즈 신부님을 도와주었던 이명래(요한)에게 전수되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기에 공세리성당은 이명래 고약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다.


    공세리성당 미사시간

    (주일) : 06:00, 10:00(교중), 19:00(동절기),19:30(하절기)

    (토요특전) : 19:00(동절기), 19:30(하절기)

    :06:00

    , : 19:00(동절기), 19:30(하절기)

    , : 09:30

    순례자 미사시간 화~11:99. 일요일 : 11:30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 (공세리)

    공세리성지성당 041-533-8181







    공세 곳창지(貢稅 串倉址)와 천주교회


    이곳은 조선시대 조세미(租稅米)를 보관하던 창고인 조창(漕倉)이 있던 자리이다.

    조창은 수송이 편리한 수로(水路)연변에 설치 했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 아산현 창고조()에는

    이곳에 중종 18(1523)80칸의 창고를 짓고 아산 한산.연산.당진 등 인근 40개 고을의 세곡(稅穀)을 거두어 보관하였다가

    아산만의 물길을 이용해 60척의 조운선으로 서울 경창(京倉)으로 수송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조창은 영조 38(1762)에 충청도 해운판이 폐지되면서 기능이 약화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없어졌는데 지금도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또한 이곳은 편리한 해운교통 때문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는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천주교 박해당시 이를 피해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 유입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1866년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에는 걸매리에 거주하는 박익서, 박원서, 박의서 등 천주교신자 11명이

    수원 감영에 끌려가 참수를 당하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천주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곳으로

    1895년 충청남도내에서는 최초로 천주교회 본당이 창설되면서 초대 성 일론(에밀리오) 신부가 부임 포교활동을 하다가

    1922년 군내 최초의 외국 건축양식인 고딕식 건물로 현 성당을 준공.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아산만은 삼국유사에 동명왕 주몽의 아들 비류가 고구려에서 남하 최초로 도착하여

    정착했던 곳(미추홀 = 밀두리)으로 고대에는 백제의 멸망을 가져온 나당연합군과의 전투 현장으로써

    근대에는 청일전쟁(1894. 7. 25)의 시발지로 외세에 의해 전쟁터가 되는 등

    우리 민족의 과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기도하다  
















      순교자 32위의 뿌리를 찾아서~(신유-병인박해)

    (연번, 성명, 세례명, 나이, 거주지, 순교일, 순교지, 기타사항 순으로)


    1.하 하발라 아산 반대마을 1853.3 아산 해미에서 투옥, 석방 후 병사

    2 박홍갑 18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6 서울 박의서의 아들

    3 김중백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6.10 수원

    4 지 글라라 58세 아산 구만이(현 구말라) 1867 공주 병인박해 때 공주로 피신

    5 박의서(사바) 62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7.8.8 수원 걸매회장

    6 박원서(마르코) 51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7.8.8 수원 박의서의 첫째동생

    7 박익서 45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7.8.8 수원 박의서의 둘째동생

    8 박인서 38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7.8.8 수원 박의서의 사촌, 옥중 영세

    9 이씨(여) 38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8.8.8 수원 박의서의 종제수, 옥사

    10 이 마리아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7.8.8 수원 박원서(마르코)의 처

    11 박제환(베드로) 18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7 서울 처가에 갔다가 잡힘

    12 김 필립보 57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8.7 남양

    13 박 마리아 57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8.7 남양 김 필립보의 처

    14 김흥서(토마tm) 38세 수원 갈매(현 아산 걸매) 1868.8.3 남양

    15 조 모니카 50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8 수원 옥사 박의서의 종수

    16 박 알렉산델 31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8 서울 조 니카의 장자

    17 이학습 42세 수원 갈매(현 아산 걸매) 1867.9 수원

    18 김지득 47세 새원여(현 밀두리) 1867년 가을 수원

    19 김장복 수원 밀머리(현 밀두리) 1866.12 서울

    20 김씨 수원 밀두리(현 밀두리) 1866.12 수원 김장복의 처

    21 장원심 50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8 수원 신문 교우

    22 장팔보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8 수원 아산 용봉골 피난후

    23 오인악 18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8.6 수원 모친은 방면됨

    24 최 사도요한 45세 수원 걸매(현 아산 걸매) 1869.8.25 수원

    25 유만여(요셉) 28세 아산 산소밀(현 아산 산정리) 1879 서울 옥사

    26 함 요한 45세 아산 뒷내 공주

    27 함 베드로 20세 아산 뒷내 1867.4.9 공주 함 요한의 아들

    28 이 요한 아산 쇠재현(현 아산 성내리) 1871.3.19 서울 이 베드로의 부친

    29 이 베드로 아산 쇠재현(현 아산 성내리) 1871.3.19 서울 이 요한의 아들

    30 이 프란치스코 아산 쇠재현(현 아산 성내리) 1871.3.19 서울 이 베드로의 아들

    31 장요한 50세 아산 등골 서울

    32 김 바오로 52세 수원 밀머리(밀두리) 수원





    순교자 묘지 (The Cemetery of the Martyrs)


    이곳은 천주교를 박해하던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1873년 병인박해가 끝날 때까지

    단지 천주(하느님)을 믿고 공경한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으신 공세리 지역의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아산지역의 첫 순교자는 18253월에 체포되어 해미에 투옥되었다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한 하 바르바라를 시작으로

    특히 병인박해 때 걸매리 출신 박씨 일가는 물론

    박홍갑, 오인악, 박제환(베드로) 등은 당시 불과 18세의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광스런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고귀한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면서까지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던

    이곳에 모셔진 순교자들의 삶과 얼, 정신을 우리는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 평생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순교자 박원서 마르코)




    공세리 성지 성당박물관


    1890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아홉 번째이자, 대전교구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공세리 성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태동에서부터 박해와 영광스런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박물관은 크게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한 초대 교회의 교우촌 생활에서 부터 신유-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

    그리고 한국 전쟁 당시 순교한 성직자들의 활동 모습을 그리고 있다.

    본 관은 충남도지정문화재(기념물) 144호인 구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봉헌된 것으로,

    대전교구 최초의 감실을 비롯한 1,500여점 유물과 공세리 성당 제2대 신부인 드버즈 신부의 유물,

    그리고 신유-병인박해 때, 이 지역 순교자들을 유해를 모시고 있다.

    공세리 성지 성당 박물관은 대전교구에서 첫 번째로 행해진 성체거동행렬답게 성체 신심 안에서,

    신앙 선조들의 참된 믿음을 이어받아 많은 이들에게 교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터전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세상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뿌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장이 되기를 희망한다.









    공세리성지를 지키는 보호수(The Protected Tree)


    수종 : 팽나무, 지정일 : 1982.11.10. 지정번호 : 8-16-9-335 수령 : 350

    이 나무는 높이가 24m에 달하고 나무 둘레가 6m에 가깝다.

    수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는 공세리 성당건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성당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품위있게 한다.

    자연스레 지형에 맟춰자란 뿌리와 패이고 갈라진 웅장한 나무줄기는 그 동안 평탄치 않은 세월의 한을 한아름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나무는 공세리 성당 문지기 나무로 불려지며 성당에 들어서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숙연하게 할 뿐 아니라

    웅장하게 뻗은 나무 그들에 잠시 머물러 있노라면 세속에 찌들고 지친 마음들이 차분하게 정화되고 새로워짐을 느낄 수 있다.




    십자가의 길 14처



















    성 에밀리오 일론 신부 공덕비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순교 100주년 기념비










    성체조배실


    성체조배란? 

    성체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과의 대화, 기도, 봉헌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성체조배를 통해 우리들은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과 은총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성 알퐁소는 "하루 15분의 성체조배로 다른 여러가지 심신행위를 24시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명래 고약(李明來 膏藥)


    공세리 성당의 신앙선조들 가운데 박씨 순교자들의 증조부 박만선 공으로부터 시작된 아산만과 삽교천을 잇는 방조제 공사는

    공사에 임한 토착민들에게 힘든 노동이외에도 창상과 욕창 그리고 고름병과 같은 질병을 가져다 주었다.

    이에 드비즈신부는 구휼책(救恤策)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서양의술과 한방기법을 활영하여 자신이 직접 고약을 만드니,

    이것이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딴 '성일론 고약'이다.

    1906년 드비즈 신부가 이명래(李明來, 요한)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해 주어 오늘의 '이명래 고약'으로 전해진다.

    독실한 신자였던 이명래는 드비즈 신부를 찾아가 잔심부름을 하며 '성일론고약'의 제조법과 치료법을 배우게 된다.

    당시 일본군 장교 사사키도 이 고약으로 치료를 받고 완치되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그 약효를 기고해 '이명래 고약'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다.

    이렇게 이명래 고약은 드비즈 신부에게서 나온 것으로

    국내 최초의 양약인 활명수와 함께 가장 오래된 장수 의약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