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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0. 5. 13. 04:30

    서울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연산군묘는 조선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 愼氏, 1476~1437)의 묘역이다.

    연산군은 성종(成宗)과 폐비 윤씨(廢妃 尹氏)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의 사화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반정으로 폐위되고, 이복동생 중종(中宗)이 왕위에 올랐다.

    이후 연산군으로 강등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어, 그 해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1512(중종 7) 부인 신씨가 묘를 강화도에서 이곳으로 옮겨줄 것을 요청하여

    중종은 1513(중종 8) 왕자의 예에 따라 묘를 옮기고, 양주군의 관원이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왕자의 묘제에 따라 곡장, 혼유석, 장명등, 문인석, 재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에 있는 석물들은 조선 전기 능묘 석물의 조형을 볼 수 있다.

    연산군묘 아래쪽에는 태종(太宗)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 趙氏, ?~1454)의 묘,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徽順公主, 1495~?)와 사위 능양위 구문경(綾陽尉 具文暻, ?~?)의 묘가 있다.


    ※ 사화(士禍) :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라는 뜻으로,

    연산군 재위기간 중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와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가 일어났음.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태종 후궁 의정궁주 조씨묘







    연산군묘()와 거창군부인 신씨묘()














    능양위 구문경묘()와 휘순공주묘()








    서울 연산군묘


    조선 10대 왕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역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은 성종(成宗, 1457~1494)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1482) 사이에서 태어난 성종의 첫째 아들이다.

    성종 10(1479) 생모인 윤씨가 폐위되자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손에서 자랐고, 실제로 생모로 알고 자랐다.

    성종 14(1483)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고, 1494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성종의 능지문(陵誌文, 능주인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글)을 읽으면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았다.

    즉위 초에는 성종 말기에 나타난 사치풍조를 잠재우기 위하여

    구체적인 금지조항(禁制節目, 금제절목)을 만들어 강력히 단속을 하였고,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상평창(常平倉) 등을 더 설치하여 물가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문신(文臣)의 사가독서(賜暇讀書,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였으며,

    종묘(宗廟)에 신주를 모시는 제도(祔廟制度, 부묘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증보 및 수정을 계속하였다.

    또한 비융사(備戎司)설치하여 철갑옷과 무기를 만들었고, 왜인(倭人)과 여진인(女眞人)

    격퇴하거나 회유하는 등 국방정책에도 힘을 썼다.

    그러나 재위 4(1498)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세조의 왕위 찬탈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글)

    사초(史草, 실록 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에 실린 것이 문제가 되어 많은 사림들이 처형되였고(戊午士禍, 무오사화),

    이후 재위 10(1504) 생모 윤씨의 폐위 문제로 다시 훈구대신과 많은 사림들처형되었다(甲子士禍, 갑자사화).

    사화 이후 국정에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하여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이 났고

    성균관과 원각사를 기생 집합소와 유흥장으로 만들었으며,

    잔혹한 형벌을 시행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다. 결국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에서 폐위되어

    강화 교동에 유배된 후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처음 묘소는 유배지인 교동에 조성되었으나

    중종 7(1512) 부인 신씨가 중종에게 묘소 이장을 요청하여 현재의 자리에 묘를 이장 하였다.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 愼氏, 1476~1537)는 거창부원군 신승선(愼承善)의 딸로

    성종 19(1488)에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되었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王妃)가 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군부인(郡夫人)으로 강등되었다.

    중종 32(1537)에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연산군묘와 역사를 같이한 은행나무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 하였고,

    이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연산군묘의 석물


    연산군묘는 쌍분으로 무덤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연산군, 오른쪽(동쪽)이 거창군부인 묘이다.

    상설은 곡장, 상석 2개, 장명등 2개, 향로석 1개, 망주석 1쌍, 문인석 3쌍, 표석 2기가 배치되어 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폐비 윤씨(1455~1482)1473(성종 4) 숙의(淑儀)로 간택되었다가,

    1476년에 성종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투기(妬忌)의 죄로 1479년에 폐위되었다가 3년 뒤 사사되었다.

    연산군은 즉위 후 자신이 폐비 윤씨의 소생임을 알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1504년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회릉(懷陵)이라 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에게 올려진 모든 칭호가 삭탈(削奪)되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연산군의 시

    昨趨思廟拜慈親(작추사묘배자친) 어제효사묘에 나아가 어머님을 뵙고

    尊爵難收淚滿茵(존작난수루만인) 술잔 올리며 눈물로 자리를 흠뻑 적셨네.

    懇追情懷難紀極(간추정회난기극)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건만

    英靈應有顧誠眞(영령응유고성진)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리 

    - ‘연산군 일기46, 8(1502) 95(갑술)-




    어린 왕자들의 죽음


    연산군은 거창군부인 신씨 등 여러 후궁에게서 많은 자녀를 출생하였으나,

    성장하여 책봉을 받고 결혼을 한 자녀는 많지 않다.

    선원록에 의하면 거창군부인 신씨의 소생으로 2(세자 황, 창녕대군) 1(휘순공주),

    후궁의 소생으로 2(양평군, 왕자 돈수), 1(옹주)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 외 자녀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자식을 떠나보낸 아비의 마음

    宗社幽靈不念誠(종사유령부염성) 종묘 사직 영혼이 나의 지성을 생각지 않아

    如何忍頑我傷情(여하인완아상정) 어찌 이다지 내 마음을 상하는 지

    連年四子離如夢(연년사자이여몽) 해마다 네 아들이 꿈 같이 떠나가니

    哀淚千行便濯纓(애루천행편탁영) 슬픈 눈물 줄줄 흘러 갓끈 적시네.

       - 연산군일기 권 52, 10(1504) 127(기축) -




    연산군 관련 가계도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연산군묘에 있는 이유?


    의정궁주 조씨는 본관이 한양인 조뢰의 딸로 태어나 세종 4(1422)에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 태종이 세상을 떠나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의정궁주 조씨묘가 연산군묘에 있는 이유는 이 땅이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는데,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가 없던 의정궁주의 제사를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 위치에 의정궁주 묘를 조성하였고, 그 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의정궁주 묘 위쪽에 연산군묘를 이장한 것이다.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정의공주 묘역 맞은편에는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1476~1506)의 묘소가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폭군이라고 하면 연산군이 가장 먼저 떠오를 만큼 사납고 악한 이미지가 따라다니는 왕입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처음부터 그런 왕은 아니었습니다. 즉위 초기에는 앞날이 기대되는 젊은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왕이 되고 싶었던 연산군이 왕권을 견제하던 신하들과 대립하면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어머니 폐비 윤씨의 비참한 죽음도 한 몫 했습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두 사건을 일으켜 많은 신하를 죽이고 귀양 보냈습니다.

    사화(士禍)는 신하와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을 일컫는 말입니다.

    연산군은 백성의 어려움과 고통을 외면한 채 갈수록 난폭해지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1506, 참다못한 신하들은 마침내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합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1년도 지나지 않아 강화도 유배지에서 31세의 나이로 병들어 죽게 됩니다.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 쓸쓸한 최후를 맞은 연산군은 도봉구 방학동 묘소에 부인 신씨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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