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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0. 5. 12. 04:30

    양효공 안맹담(良孝公 安孟聃)과 정의공주(貞懿公主) 묘역(墓域)


    이곳은 양효공 안맹담(良孝公 安孟聃, 1415~1462)과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貞懿公主, ?~1477)의 무덤으로,

    서측이 안맹담, 동측이 정의공주 무덤이다. 이들은 1428년에 결혼하여 42녀의 자녀를 두었다.

    안맹담(본관 죽산)은 초서를 잘 써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출중했다.

    정의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책력(冊曆)(算術)을 잘 이해했다.

    세종대왕은 특별히 정의공주를 아껴 저자도(옥수동 동쪽 한강에 있었던 섬)

    낙천정(광진구 자양동에 있었던 정자)을 내려주기도 했다.

    안맹담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양효공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은 온화하고 선량하다는 의미이며, ‘()’는 어질고 은혜롭게 어버이를 섬겼다는 의미이다.

    불심이 깊었던 정의공주는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보물 제966)이라는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무덤 앞에는 안맹담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 석등(石燈), 문관의 형상을 한 문인석(文人石),

    묘 앞에 세우는 비석인 묘갈(墓碣) 등이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만들어 세웠다.

    1466년에 세워진 안맹담의 신도비는 조선 초기의 신도비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신도비의 윗부분에는 양효안공묘비(良孝安公墓碑)라는 글씨가 전서체(篆書體)로 새겨져 있으며,

    몸돌에는 안맹담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부부와 사돈이기도 한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지었으며,

    글씨는 부부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安貧世, 1445~1478)가 썼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  











    안맹담(安孟聃, 1415~1462)

    본관은 죽산, 자는 덕수(德壽),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함흥 부윤을 지낸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안맹담은 1428년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혼인하여 죽성군(竹城君)에 책봉되었다.

    1432년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고, 문종이 즉위한 1450년 각 부마를 위()라 개칭하게 되면서 이후 연창위라 불리었다.

    1455년에는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초서에 능하고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며 풍류에 밝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46212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의공주(貞懿公主)

    정의공주는 조선 4대 국왕 세종(世宗)의 차녀로,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세종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하였고, 지장보살 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을 간행하였다.

    정의공주(貞懿公主, ?1477)는 세종이 즉위 전에 출생하였으나,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오빠 문종(文宗)1414(태종 14)에 출생하였고, 동생 세조(世祖)1417(태종 17)에 태어난 사실에 비추어

    1415(태종 15)에서1416(태종 16)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는 1428(세종 10)에 정의공주(貞懿公主)에 봉해졌고, 안맹담(安孟聃)과 가례(嘉禮)를 치렀다.

    안맹담은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로,1428(세종 10)에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가

    1432(세종 14)에 연창위(延昌尉)로 개봉되었다.

    정의공주는 연창위와의 사이에서 42녀를 두었다.

    아들은 안여달(安如獺안온천(安溫泉안상계(安桑鷄안빈세(安貧世)이고,

    1녀는 정광조(鄭光祖)의 부인, 2녀는 한치례(韓致禮)의 부인이다.

    한치례는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아들로, 덕종비 소혜왕후의 동생이다.

    1462(세조 8) 12월에 연창위가 사망하자 2남 안온천이 시묘살이 중 22세로 졸하였고,

    1477(성종 8) 2월에 정의공주가 사망하자 4남 안빈세도 시묘살이 중 32세로 사망하였다.

    정의공주는 세종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세종이 중국에서 사온 안장을 손수 고치려고 칼로 깎다가 칼끝이 다리에 박히자

    공주는 술을 만들고 난 지게미[醋粕]를 데워 상처에 붙여 부기가 빠져나가게 한 후

    자석(指南鐵)을 가지고 부러진 칼끝을 빼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안맹담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협조하여 성록대부(成祿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1455(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1457(세조 3) 수록대부(綏祿大夫)에 가자되었다.

    이러한 남편의 공훈에 힘입어 정의공주는 세조로부터 노비와 전토 등을 받았다.

    또한 성종은 공주의 건강이 좋지 않자 4남 안빈세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하였고, 왕비와 함께 친히 문병을 가기도 하였다.

    정의공주는 1477(성종 8)에 사망하였다.

    정의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는데, 역산(曆算)에 능하였다.

    죽산 안씨 대동보에 따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이 잘 풀리지 않아

    여러 대군들과 공주에게 풀어보도록 하였는데, 공주가 이를 풀어 세종의 칭찬을 듣고 노비를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또한 세종이 창제된 훈민정음을 공주에게 주어 민간에서 시험해 보도록 하자,

    공주는 그 결과를 세종께 바쳤다고 전해진다.

    정의공주는 불교에 조예가 있었다. 연창위 안맹담과 함께 세종 승하 후

    소헌왕후와 세종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문수사(文殊寺)를 중창하였다.

    안맹담도 평소 불경을 읽고, 살생을 싫어하여 양잠(養蠶)도 하지 않는 등 공주 부부는 불교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의공주는 1469(예종 1)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죽은 연창위 안맹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정의공주 간행 지장보살본원경은 보물 제966호로 지정되었다.






    양효안공묘비(良孝安公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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