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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성 박수량 백비(長城 朴守良 白碑) - 전라남도 기념물 제198호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0. 7. 16. 04:15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정혜 박공 신도비(資憲大夫 議政府 右參贊 貞惠朴公 神道碑)

    전서는 의정부 우찬성 이용원이 썼다.

    신도비가 세워진 때는 정해 3월이다. 정해년은 서기로 환산하면 1887년이다.

    신도비는 경연관 서연관 송병선이 글을 짓고 공조판서 겸 의금부사 최익현이 글씨를 썼다.

     

     

    아곡 박수량 묘비

    박수량은 별세 후 250년이 지난 1805년에 정혜공이란 시호를 받았고,

    묘비는 박수량 사후 330년 지난 1888년에 세워졌다.

    묘지 비문은 읽기 어려울 정도로 부분적으로 훼손이 심하지만,

    끝에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의 이름이 남아 있어 하서가 쓴 묘지명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청백리 제도

    청백리란?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가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로

    조선시대에 특별히 국가에 의해 선발되어 청백리란(淸白吏案)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

    청백리는 죽은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염근리(廉謹吏),

    혹은 염리라고 불렀으며, 깨끗하고 유능한 관리를 뜻함.

    청백리는 부정부패하지 않고 깨끗한 것에 그치지 않으며 인의(仁義)가 넘쳐야 함.

    백성을 처자식과 같이, 나랏일을 정의롭게, 백성의 신뢰를 얻은 관료.

     

    청백리의 유래

    청백리를 선발하고 표창하는 일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한나라 문제 12년(168년)에 염리(廉吏)를 선발하여 표창하고 곡식과 비단으로 상을 준 것이 처음임.

    우리나라는 고구려 시대부터 청백리를 표창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총 218명의 청백리가 선발되었음.

     

     

    아곡 박수량의 일화

    김개 선생의 수제자로 12살에 고부에서 망해부(望海賦)라는 글을 지어

    12살 나이에 장원을 하신 신동이라고 알려진 어른이다.

    문과에 출사하여 관직에 나간 이후 작은 벼슬을 많이 거치고 참판 시절에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조선시대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무조건 3년 상을 치러야 했다.

    박수량이 참판 시절 고향에 내려와 상인(喪人) 생활을 하는데,

    상인답게 생활하지 않고 호의호식을 한다는 허위보고가 되어,

    조정에서 암행어사를 보내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암행어사가 내려와 사실을 확인하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박수량에 대해 조정에 다시 보고가 되었다.

     

    (당시 명종이 쓴 편지 내용)

    “경을 만나지 못한 것이 오래 되었도다. 건강상태는 또한 어떠한지 궁금하오.

    듣건대 경의 집 부엌에서 연기가 나지 않을 때가 한 달 동안에 곧잘 반이나 된다 하거니와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나라 동산의 벼가 막 익었음에 몇 말을 타작하여서 보내노라.

    비록 물품은 빈약하되 마음의 뜻은 큰 점을 그대는 어찌 여기는지.

    마땅히 궁궐에 들어와 나를 보좌하여야 할 터인데 간절히 바라고 바라노라.

    나머지는 격식을 갖추지 못하오.

    - 인정전에서 쓰다 -

     

    백비(白碑)

    전남 장성 소나무 숲 한 묘지 앞을 지키는 낯선 비석.
    이름도, 내용도 없이 단 한 자의 글자도 새기지 않아 붙여진 이름 백비(白碑)
    이곳에 묻힌 이는 조선의 선비 박수량(朴守良, 1492 ~ 1554)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 충청 도사, 동부승지, 형조판서... 39년의 공직 생활.
    그러나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청빈한 삶.
    '그가 죽었을 때 집에 돈이 없어 가족이 상여를 메고 고향도 가지 못하니
    신하들이 임금께 청하여 겨우 장사를 치렀다.'
    - 명종실록 1554년 1월 19일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지킨 청렴의 절개 그리고 역사에 기록된 이름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의 백비. 이름조차 없는 백비에 아로새겨진 목민관의 참뜻을 생각합니다.

     

     

    백비

    박수량의 청백을 알면서 빗돌에다 새삼스럽게 그가 청백했던 생활상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지 모르니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

    - 명종 임금 -

     

     

    백비를 찾은 기관, 단체

     

    장성 박수량 백비(長城 朴守良 白碑) - 전라남도 기념물 제198호

     

    '박수량 백비'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아곡(我谷) 박수량(1491~1554) 선생이 돌아가시자

    명종 임금께서 서해 바다에서 돌을 골라 글자 하나 새기지 않고 내려준 묘 앞에 세운 묘비(墓碑)이다.
    명종 임금은 "박수량의 청렴을 알면서 새삼스럽게 비석에 업적을 새긴다면

    오히려 그의 청백함을 잘못 알수 있으므로 글자 없이 그대로 세우라."라고 하였다.
    박수량 선생은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514년 과거에 합격한 후 성균관, 승문원, 사헌부, 사간원, 춘추관 등을 거치고,

    호조, 예조, 형조, 공조판서, 함경도, 전라도 관찰사,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 우참찬 등

    39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오랜 관직 생활과 높은 벼슬에도 불구하고 한양에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하였고,

    아들에게는 '묘도 크게 만들지 말고 시호도 받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자손들이 선생을 한양에서 고향인 장성으로 모셔 내려갈 장례비 조차 마련하지 못하자

    명종 임금은 장례를 지원해 주었으며,

    선생의 고향 아치실마을에 99칸의 청백당(淸白堂)을 짓도록 하였다.

     

     

    박수량 백비(朴守良 白碑)

    조선 중기에 문신으로 활동했던 박수량(1491~1554)의 묘소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아무런 글도 쓰여 있지 않아 백비(白碑)라 불리고 있는데,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그의 공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글을 남기지 않았다고 전한다.

    비석의 주인공인 박수량은 자(字)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我谷),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벼슬은 예조참판,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조정에 출사한 시기가 38년이나 되고 재상에 이르는 직위에까지 올랐지만,

    조그만 저택도 없을 정도로 청렴했다고 한다.

    박수량이 생전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초야(草野)의 출신으로

    외람되게 판서(判書)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이 분수에 넘쳤다.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장례 치를 비용도 없을 정도로 곤궁해 대사헌 윤춘년(尹春年)이

    명종에게 아뢰어 겨우 장사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박수량의 청빈한 삶과 청백리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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