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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1. 5. 27. 21:45

    정릉 아리랑시장

     

    정릉(貞陵)과 흥천사(興天寺) 이야기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고,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릉 – 조선 제1대 태조비 신덕왕후 능

    태조는 계비 신덕왕후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궁에서 가까운 곳인 황화방(현재의 정동)에 웅장하게 능을 조영(造營)하였다.

    1409년(태종 9)에 도성 안에 있던 정릉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1669년(현종 10)에 정릉으로 복권되면서 지금과 같이 조성되었다.

     

     

    흥천사 - 조선 제1대 태조비 신덕왕후 원찰(願刹)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395년(태조 4) 왕이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능지를 정릉에 조영(造營)하고,

    왕비(王妃)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 1396년 창건하기 시작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大伽藍)이 완성되었다.

     

     

    정릉(태조비 신덕황후) 매표소

     

     

    정릉 재실(貞陵 齋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陵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와

    그의 부속 공간인 행랑(行廊)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0년에 재실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초석만 남기고

    1960년대 멸실되었던 정릉 재실은 2012년 재실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거쳐

    1788년 발간된 춘관통고(春官通考)의 기록과 일치하는 6칸 규모의 재실터와

    건물 배치 등 양호한 형태의 유구를 확인하여 2014년에 복원하였다.

     

     

    금천교(禁川橋)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하는 다리다.

    600여 년의 세월을 견뎌온 금천교의 교각과 돌에서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능의 구성

    정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고황후 강씨의 능이다.

    단릉의 형식으로, 능침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를 배치하였다.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이 조성당시의 것이며 나머지 석물은 현종 대에 다시 조성하였다.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있고,

    일반 조선왕릉과 달리 직선축이 아닌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었다.

    진입공간에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능의 역사

    1396년(태조 5)에 신덕고황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취현방(현 영국대사관 근처)에

    정릉을 조성하고,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조성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 태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릉은 푸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고,

    정릉이 도성 안에 있다는 이유로 사을한산(현 정릉)으로 천장하였다.

    이 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하도록 하였다.

    민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 : 조선왕릉 royaltombs.cha.go.kr/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제향 공간의 중심 건물로 모양이 정(丁)이라는 글자와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제향을 모시는 정전(正殿)과 수행한 향관들이 배열하는 배위청(拜位廳)으로 나뉜다.

     

     

    수라간(水刺間)

     

    수라간은 왕릉에 제향을 지낼 때 쓸 제사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등의 준비를 하는 곳이다.

     

     

    소전대(燒錢臺)

     

    정자각 왼쪽 뒤편에 있는 소전대(제사를 지낸 뒤 축문을 태우는 석물)도

    조선 초기 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9월 23일 신덕왕후를 기리는 제사가 진행된다.

     

     

    大韓 神德高皇后貞陵(대한 신덕고황후정릉)

     

    비각에 있는 표석 앞면에는 전서(篆書)로 '大韓 神德高皇后貞陵'이 새겨져 있다.

    '대한제국 신덕황후의 정릉'이라는 뜻이다.

    대한제국 때인 광무 3년(1899) 고종이 황후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옛 비석의 표면을 갈고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뒤쪽을 보면

    비석과 받침돌 사이에 간격이 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비석 뒷면에는 고종이 직접 쓴 신덕왕후의 발자취가 담겨 있다.

     

     

    수복방(守僕房)

     

    수복방은 능에서 화재나 부정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는 수복이 근무하는 곳이다.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신덕고황후 강씨(재세 : ?년 ~ 1396년 음력 8월 13일)는

    본관이 곡산인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태어났다.

    강씨집안은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향처(鄕妻,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와 경처(京妻,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는 고려의 풍습에 따라

    신덕고황후는 태조의 경처가 되어 2남(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1녀(경순공주)를 낳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의 향처 한씨가 이미 조선 개국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신덕고황후가 조선 최초로 왕비(현비)로 책봉되었다.

    태조 재위 시절 자신의 둘째아들(의안대군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등

    지지기반을 닦았으나 이는 후에 왕자의 난의 씨앗이 되었다.

    1396년(태조 5)에 이득분의 사저에서 세상을 떠났고,

    1899년(광무 3)에 신덕고황후로 추존되었다.
    태조는 신덕고황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의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매우 말라 우물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리따운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였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을 띄워 그에게 건네주었다.

    태조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처자는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태조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하여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세계문화와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

     

    세계유산위원회는 조선왕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함

    이 목록에 등재함은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가 있는 문화 및 자연유적임을 인정함.

    등재일자 2009. 6. 30 유네스코 사무총장

     

     

    사적 제208호 정릉(貞陵)

     

     

    서울 정릉(貞陵) : 조선 제1대 태조고황제 두 번째 황후 신덕고황후 능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1396)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姜允成)의 딸로

    태조의 두 번째 왕비이다. 신덕고황후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태조고황제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 영역을 넓혀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덕고황후는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 최초로 왕비(현비·顯妃)에 책봉되었다.

    (태조고황제의 첫 번째 왕비였던 신의고황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 세상을 떠났음).

    이후 자신의 둘째 아들 방석(의안대군·宜安大君)을 왕세자로 책봉시키는 등

    정치적 지지 기반을 닦았으나 훗날 '제1차 왕자의난'의 씨앗이 되었다.

    1396년(태조 5) 신덕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시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정하고,

    현 정동(貞洞) 영국대사관 부근에 정릉을 조성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 흥천사(興天寺)를 세웠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 정릉은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고,

    능의 석물과 목재 일부는 청계천 광통교 및 태평관 공사에 사용되었다.

    태종은 신덕왕후를 태조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아 능을 옮긴 후

    정릉의 형식은 일반인의 묘나 다름없었으나, 1669년(현종 10년)에 신덕왕후의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왕비로 인정받은 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하였다.

    1899년(광무 3년) 고종이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추존하면서,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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