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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박사유적지 돌탑의 유래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20. 7. 2. 21:33
천자문 계단(千字文 階段)
천자문 계단은 250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입구의 1계단 천지현황(天地玄黃)의 4자(四字)로 시작해
계단마다 4자(字)씩 보면서 250계단을 오르면 1,000자를 읽을 수가 있다.
왕인박사유적지 돌탑의 유래
마을 어귀에 쌓은 돌탑은 옛날부터 액(厄)을 막고 복을 불러들인다고 믿던 신앙의 대상이었다.
험준한 고갯길에서 만나는 돌탑은 맹수를 물리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다음 사람을 위해 늘 돌을 채워 놓았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돌을 던져 전투를 하는 석자군(石子軍)이라는 군대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앞치마로 돌을 날라 와 석전(石戰)으로 왜군에게 대승을 거둔 행주대첩은
그때까지 남은 석자군의 명맥이었다.
또 정월대보름이나 단오절의 돌팔매 놀이는 편싸움 또는 석전이라고 했는데,
고구려와 고려, 그리고 조선 왕이 참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석역당(石役幢), 고려 석역군(石役軍), 조선 척석군(擲石軍)은 모두 석자군과 같은 군 편제이다.
병기가 발달하면서 돌을 더 이상 무기로 쓰지 않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오랜 습관대로 길가 돌무더기를 보존해, 맹수나 산적으로부터 여행길에 안전하기를 기원했다.
돌무더기를 석성황(石城隍)이라 부르며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돌탑과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로 중국 강태공(姜太公)의 일화를 빼 놓을 수 없다.
강태공은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폭정을 피해 낚시바늘이 없는 낚시대를 드리우며 세월을 낚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궁핍을 견디지 못한 부인은 집을 나가 버렸다.
강태공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드리우며 때를 기다린 지 10여 년 만에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周)나라 문왕을 만나 재상으로 등용되었고,
훗날 주왕의 군대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강태공이 제(濟) 땅을 영지로 받아 제후가 된 후 부인이 찾아와 함께 살겠다고 했다.
그러자 강태공은 물을 떠 가지고 온 뒤 바닥에 쏟아 붓고는 부인에게 주워 담으라고 했다.
부인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강태공은 ‘한 번 쏟아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復水水返盆)’며
같이 살기를 거절했다. 뒤에 부인이 죽자 사람들이 돌무덤을 쌓아 주었다고 한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왕인로 440 (동구림리) 왕인박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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