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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탄생 200주년 기념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21. 1. 25. 04:46

    2021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탄생 200주년 기념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작가 / 정석희 라파엘)

     

    1821년 3월 솔뫼,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에게서 탄생

     

    "(김대건) 안드레아는 1821년 8월에 충청도에서 출생했습니다.

    김해 김씨의 가문은 이제는 왕족의 존귀함은 다 없어지고,

    종교적으로 훨씬 더 유명한 집안이 되었고,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

     

     

    1836년 7월 용인,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

     

    “나(모방) 신부가 남쪽 지방으로 내려갈 때,

    지나가는 길에 저의 집에 들어와 제 아들 재복(再福, 대건)을 보고는

    제자로 데려가고자 했으므로 부득이 허락했습니다.”

    - ‘일성록’ 기해(1839년) 8월 7일 -

     

     

    1836년 12월, 정하상 바오로 등의 인도로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유학길에 오름

     

    모방 신부는 세 신학생에게 “나와 조선 포교지의 후계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약속합니까? 약속합니다.”...

    이 서약을 1836년 12월 3일 성경에 손을 얹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 1836년 12월 3일자 서한 -

     

     

    1837년 6월~1842년 2월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신학 수업

     

    ”르그레즈와 신부가 그 교육을 나에게 전적으로 맡긴 3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선생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합니다.

    그들은 그들을 가르치는데 위로를 주고 그 수고를 보상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1837년 10월 6일자 칼르리 신부의 서한 -

     

     

    1842년 12월 의주성, 소 틈에 끼어 입국시도(1차 입국)

     

    ”조선에 들어갈 때에는 거지로 위장할 작정입니다....

    성문에는 군인이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마다통행증을 내 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마침 변문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 지나갔습니다.

    요행히 몸집이 큰 소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 1843년 1월 15일자 김대건 신부의 서한 -

     

     

    1844년 소팔가자(小八家子) 성당,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 수품

     

    ”우리 두 학생은 곧 대품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 즉 페레올 주교를 수행하게 될 학생은 신품까지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는 12월의 입국은 가망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조선인 사제 한 명을 만들고자 합니다.“

    - 1844년 5월 19일자 매스트르 신부 서한 -

     

     

    1845년 4월 서해, 사흘 밤낮 폭풍우로 침몰 직전, 위로와 용기를 줌

     

    ”교우들은 사흘 동안 먹지 못하여 극도로 쇠약해졌고 또 삶에 대해 절망하여 슬퍼져서 울며

    ‘이제는 그만이다.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성모님의 기적의 상본을 보이면서

    ‘겁내지 마십시오.

    우리를 도우시는 성모님이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 1845년 7월 23일자 김대건 신부 서한 -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 수품

     

    ”안드레아는 8월 17일 주일, 상해 근처(20~30리 떨어진) 한 교우촌(금가항 성당)에서

    조선 대목(大牧) 페레올 주교에 의해 사제서품되었습니다.

    4명의 서양 신부, 1명의 중국인 신부가, 또 거기에 교우들이 무리를 지어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사제직에 오른 첫 번째 조선인입니다.“

    -1845년 7월 8일자 고틀랑 신부 서한 -

     

     

    1846년 4월 은이 공소, 부활대축일 미사

     

    ”병오년에 (김대건) 신부가 응이 상뜸이(현 골배마실)모친댁에 계시다가 ‘쉬이 길을 가겠다.’

    하신즉 (신부의) 모친이 부활첨례나 본 후까지 기다리기를 청하매

    부활첨례 보시고 1부 첨례날에 떠나 서울‘로 갔다.

    -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중 임루치아 증언 -

     

     

    1846년 6월 황해도, 순위도 등산진(登山鎭)에서 체포

     

    “고을 아전이 ‘어떤 양번인가 알아보겠다.’하여 배에 올라 김 신부와 말을 주고 받을 때

    신부 말이 서투른 고로 아전이 타국 사람으로 알고 잡아 관가에 들이매

    첨사도 할 수 없어 (해주) 감영으로 보고하였다.”(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중 김성서 요아킴 증언)

    “그는 조선 선교지의 유익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사명을 수행하다가, 포졸들한테 체포되었습니다.”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중 김 프란치스코 증언 -

     

     

    1846년 9월 16일 새남터, 효수형으로 순교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

     

     

    1846년 10월, 미리내 성당

     

    ‘박 바오로, 서 야고보,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사도요한, 이민식 빈첸시오 등이 와서

    (문패푸리)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미리내에 안장하였다.“

    -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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