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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미순교성지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21. 5. 29. 19:26

    해미순교성지

     

    "여숫골"이라 불리는 해미 순교성지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생매장을 비롯한 갖가지 사형 방법으로 순교하고 묻힌 땅이다.

    성지 전체가 순교자들의 거대한 무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성지로 개발하기 전에는 농부들이 농사를 짓던 중에도

    사람 뼈가 나왔을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이 묻혀있는 땅이다.​

    1935년 4월 1일 이곳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함으로써,

    이곳은 다른 순교지나 무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즉 이곳은 순교터이면서 무덤이다.

    그리고 홍주성지와 함께 생매장으로 사형이 집행된 단 2곳 중 한 곳이며,

    이곳은 정확한 생매장지로 확인된 곳이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 만남을 가졌다.

     

    여숫골 : 처눚교 신자들은 죽기 전까지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기도를 바쳤는데,

    이를 당시 사람들은 ‘여수머리’라고 들었고, 그 후로 이곳을 ‘여숫골’이라 불렀다.

    ‘여수’는 ‘여우’의 사투리이다.

     

     

    해미순교성지(여숫골) 안내도

     

    해미순교성지는 수많은 이름모를 신앙 선조들의 순교성지

     

     

    성지순례길의 마음가짐

     

    성지순례는 관광이나 여행이 아니다.

    참된 순례자가 되기 위해 먼저 새로운 삶의 여정을 떠난다는 마음가짐으로 먼저 고해성사를 본다.

    일상에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참회와 회개의 태도를 갖춘다.

    성지를 순혜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기도를 바칠 것이며,

    묵상 중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기록할지 생각해두면 도움이 된다.

    성지에서는 박해와 순교 당시 사건을 느낄 수 있었던 마음을 글로 남겨 놓으면 좋다.

     

     

     

    유해발견터

     

    농사를 짓던 농부에 의해 순교자 유해가 발견된 곳

     

     

    해미순교성지기념관

     

    해미순교성지기념관 외벽 부조

     

    1866년(조선 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1882년(고종 19)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자리개질 등으로 처형하였는데,

    숫자가 너무 많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죽음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를 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당신이 천주교인이요?”

    2020년 11월 29일(대림 제1주일)~ 2021년 11월 27일(대림 제1주일 전날)

     

     

     

    프란치스코 교황님 상

     

     

    팔각의 탑

     

    이는 종탑이 아니다.

    세상 끝날까지 교회와 함께 하시면서 지켜주고 계시는 주님,

    진복팔단을 말씀하신 주님을 상징하는 팔각 모양의 탑으로 파수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교회를 상징하는 대성전과 다리(브리지)로 연결되어 있다.

    (주님은 우리 교회를 지켜주시는 파수꾼!)

     

     

    해미순교성지 대성전

     

     

    해미순교성지 소성당

     

    대성당을 축소한 형태이다.

    하지만 소성당은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주님을 바라보며

    순교자들을 본받아 기쁨의 삶을 살아가도록 천정의 십자가와 함께

    밝은 톤의 문창살로 벽을 꾸며 환한 집 안을 나타내고 있다.

     

     

    이름 없는 집(해미순교성지)

     

    이 집은 “이름 없는 집”입니다.

    순례자들이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기 위하여

    '성경 이어쓰기'를 하는 곳으로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시복기념비(諡福記念碑)

     

    최근까지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는 132명이며

    이 가운데 인언민(마르티노), 이보현(프란치스코),

    그리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증조부이신 진진후(비오) 3분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되었다. (2014.8.16)

     

     

    자리개 돌

     

    자리개 돌은 해미읍성 서문 밖 수구 위에 놓여 있던 돌다리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했던 사형도구이다.

    자리개 돌은 1956년 6월 14일 서산동문동성당으로 옮겨 보관했다가

    이후 1986년 8월 29일 본래에 있던 읍성 서문 밖으로 다시 옮겨져 안치되어 오다가

    해미 도시계획도로가 개설됨에 따라 2009년 1월 8일 여숫골(해미순교성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

    해미지역 첫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의 말씀

     

     

    여숫골

     

    1935년 프랑스 범(Barraux)신부님에 의해 순교자 유해를 찾게 되었고,

    뼈와 치아, 머리카락을 모신 기념관에는 순례자가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이곳은 순교자들이 죽음의 행렬 중에 바쳤던 "예수마리아" 기도 소리가

    구경을 하던 외인들에게는 "여수머리"로 들렸기에

    저들은 이곳을 "여숫골"이라 하여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리고 해미지역에는 또한 신앙 선조들이 압송되었던 "한티고개성지"와

    투옥, 고문, 처형이 있었던 "해미읍성성지 (옥터, 호야나무)",

    그리고 자리개질 처형이 자행된 "서문밖성지"가 있는 곳이다.

     

     

     

    해미성지(海美聖地) - 시인 김진오 베드로

     

    순례길

    성혈(聖血)로 물든 바다여

    날마다 노을꽃으로 피어나소서

    벌거숭이로 하느님 믿고 사는 게

    죄(罪)가 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외 처절한

    여숫골 생매장

    서문밖 자리갯돌 사연들...

    흘린피

    흙에 고이고 바다에 물들었나

    피 혼(魂) 자리에

    순교탑(殉敎塔) 높이 높이 세워도

    하늘에 못닿으니

    성모(聖母)님

    오늘도 진둠벙에 옷깃적셔

    영혼들 끊임없는 구애(救愛)로

    머리들 날 없으시다.

    바람 구름 흘러간 세월에

    성안 호야나무 못박혀서서

    살아 증거하니

    가지마다 멍이 들어도

    숨찬 나그네들 푸른빛 그늘로

    덮어 덮어주네

     

    2006 가을

     

     

     

    진둔벙

     

    이곳은 처형 방법이 사약, 몰매, 교수, 참수, 동사와 함께 사람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과 물에 빠트려 처형하는 수장 형장(水葬 刑場)이었다.

     

     

    진둔벙(죄인둔벙)

     

    팔을 묶여 끌려오던 신자들을 거꾸로 떨어뜨려서 이 둠벙 속에 쳐박혀 죽게하였다.

     

     

    십자가의 길 14처

     

    각처의 조형물은 죄수의 목에 채우던 족쇄형 큰 칼의 모형을 본딴 것이다.

    큰칼 구멍에 원형의 돌을 깎아서 끼워 넣고 그 표면에 그림을 조각하였다.

    그림의 한 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고,

    다른 한 면은 순교자들의 죽음의 행진을 묘사하였다.

    한국식 판화로 제작하였다. 재료는 화강석이다. 

     

     

    현감(縣監)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군무참의(軍務參議) 등의

    애휼선정비(愛恤善政碑),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청덕불망비(淸德不忘碑), 충절전망비(忠節戰亡碑) 등

     

     

    야외성전(야외미사) 

     

    해미순교탑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

    조선조 천주교 박해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선열들의

    유해 일부를이곳 해미 생매장터에서 발굴하여 1935년 4월 2일

    서산 상흥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묘셨다가

    이제 순교자 유해를 교회적 차원에서 관리하며 성지 순례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다시 원위치에 옮겨 모시다.

     

    1995년 9월 20일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경갑룡 요셉

     

     

    해미순교자 3위 복자상(海美殉敎者 三位 福者像)

     

    2014년 8월 16일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복하신 해미순교자 3위 복자상

    * 해미(海美)라는 지명을 그대로 풀어보면‘아름다운 바다’라는 뜻인데

    이 지명은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에서 한 글자씩 따와 생겨난 이름이다.

     

     

    해미순교성지 입석(海美殉敎聖地 立石)

     

    신앙선조들의 죽음의 행렬을 묵묵히 지켜온 한티고개에 있던 돌이

    이곳으로 옮겨져 이제는 생매장 순교 현장임을 알리고 있다.

     

     

    생명의 책(Book of Life)

     

    재료 :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 헤어라인

    규격 : L 4,000mm × B 3,000mm × H 450mm

    제작연도 : 2004

     

    생명의 책은 프란치스코 교황(2014. 8. 14 ~ 8. 18)이 이곳 해미순교성지에서 이루어진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말씀하신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남기기 위한 조형물이다.

    작품 속에 심겨진 호야나무(회화나무, 槐木)는 과거 천주교 박해의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미래의 가능성을 염원하고자 하였다.

     

     

    해미순교성지 역사적 배경

     

    해미(海美)라는 지명을 그대로 풀어보면 ‘아름다운 바다’라는 뜻인데

    이 지명은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에서 한 글자씩 따와 생겨난 이름이다.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 때에만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지속적인 박해 동안에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 읍성)의 두 채의 큰 감옥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이 감옥터에는 당시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리어

    고문대로 쓰여지던 호야나무 가지가 지금도 흔적을 지니고 서 있다.

    그래서 감옥터를 1950년대에 해미 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1800여 평을 확보하고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에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의 명목으로 공소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발하고 순교 기념비만 새로 세워주었다.

    그 후 오늘 날 그 터의 교회적 성역화 사업이 불허되고 있다.

    이렇게 내포에서 끌려와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순교 선열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 서문 밖에 끌어내어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욱 잔인한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지금은 해미 진영 서문 밖 바로 앞에 있는 칠십평 좁은 순교지에

    자리개질해서 죽였던 돌다리가 보존되어 있는데, 1956년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다가

    1986년 9월에 원위치로 귀환되었고 바로 그 곁에 1989년에 세운 순교 현양비가 있다.

    2009년 1월 8일에 자리개돌 원석은 여숫골 순교자 기념관 맞은편에 옮겨 보존되어 있고

    그 터에는 모조품이 자리를 하고 있다.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많은 숫자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한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들을 밀어넣어 흙과 자갈로 끌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미 지역 외인들을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 둠벙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 하는데

    이 때 캐어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해미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에서는 1935년도(일제 시대)

    서산 본당의 범 베드로 신부 지도하에 순교자의 유해 발굴 때 유해 일부와

    유품 성물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유해 발굴터인 원위치로 안장되었고,

    순교자의 유해는 별도로 보존 처리되어 보존되고 있다.(유해참배실).

    그리고 유해 발굴지 인근인 하천 위에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탑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순교자중 최근까지 불확실한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신 순교자는

    교회측기록 67명 관측기록 65명과 무명순교자로 기록된 47명으로 되어 있으나

    그밖에 이름모를 순교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모두가 무명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순교자들 중 홍주(홍성) 및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된 순교자들은 이송 사실과 이름들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아

    그 이송된 순교자들은 해미 진영장의 독자적 처결에 있어서 사후에 문책거리가 됨직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며, 해미 진영은 처형 후 문책의 배후 세력을 갖지 못한

    서민층 신자들만을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죽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해미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창설된 후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를 발족하였고 2000년 8월 기공식을 하였으며 2003년 6월 17일

    기념 성전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2014년 8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124위중 해미순교자 세 분

    즉,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가 시복되었고

    그 다음 날 17일에는 이 곳 성지를 방문하시어

    시복기념비를 제막, 축복하시었고 곳곳을 순례하셨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해미성지 미사시간

    평일. 휴일 오전 11시

    성지사무실 041-688-3183

     

    e메일 : haemi3183@naver.com

    해미순교성지 www.haemi.or.kr/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읍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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