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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 정약용 적거지(茶山 丁若鏞 謫居地)
    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21. 6. 17. 20:24

     

    다산 정약용 적거지(茶山 丁若鏞 謫居地)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장기로 452 (서촌리)

     

     

    장기유배문화체험촌

     

     

    장기에서 강진 다산초당까지 279km(725리)

     

     

    楡林晚步(유림만보) - 느릅나무 숲을 저녁에 거닐며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지음

    .

    曳杖溪扉外(예장계비외) 시냇가 사립 밖에서 지팡이를 끌고
    徐過的歷沙(서과적력사) 산뜻한 모래사장 천천히 지나가니
    筋骸沈瘴弱(근해침장약) 육신은 풍토병에 젖어 쇠약해지고
    衣帶受風斜(의대수풍사) 옷은 바람을 받아 펄럭이네.
    日照娟娟草(일조연연초) 햇살은 야들야들한 풀에 비치고
    春棲寂寂花(춘서적적화) 봄은 적적한 꽃에 남아 있구나.
    未妨時物變(미방시물변) 물건이야 절기따라 변하지만
    身在卽吾家(신재즉오가) 이 몸은 있는 곳이 우리집일세.

     

     

     

    형구(刑具)의 종류

     

    죄인의 목을 끼우고 비녀장을 질러 신체의 자유로운 활동을 막았던 형구이다.

     

    곤장(棍杖)

    곤장은 조선 후기 죄인의 엉덩이와 허벅다리를 번갈아 치는 곤형(棍刑)의 집행을 위한 형구이다.

     

    곤장형틀

    곤장으로 엉덩이를 내려치기 위해 엎드리게 하고 양 손과 발목을 묶을 수 있던 형구이다.

     

     

     

    조선시대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며,

    유배살이 또는 귀양살이라 불리웠다.

     

     

     

    장기(長䰇)와 유배(流配)

     

    ○ 장기는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거명되는 우암, 다산 등이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땅으로

    장기에서 위리안치의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우암에게 날아든 아내의 부음(訃音),

    그 소식을 접하고도 애통한 마음만을 슬픈 제문에 실어 손자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 장기는 제주도와 전남 강진, 경남 남해 등과 함께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한 곳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장기현은 서울과 864리 떨어져,

    신라 멸망 이후 변방으로 전락한 장기현은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유배형의 종류에는 流유2,000리, 流유2,500리, 流유3000리가 있었는데,

    이에 해당하는 지역은 법으로 미리 정해 두었다.

    영조 21년 12월 18일, 영조 31년 5월 14일 등에 작성된 승정원일기에

    장기는 기장, 영해 등과 함께서울에서 유3천리 정도의 거리에 해당하는 지역이었기에

    이 지역으로 유배 온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유배인은 태조1년(1392년) 설장수이고,

    이후 이승조, 이원강, 홍여방, 최윤복,조말생, 송시열, 김수흥, 이광필, 이상묵, 윤석주,

    조정상, 송영, 노성중, 정약용 등이 속속 장기로 유배 왔었다.

    이렇게 장기는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과 같은 석학에서부터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거물 학자와 정객들이 머물렀다가 간 곳으로 독특한 유배문화가 간직된 곳이다.

    ○ 신라 멸망 이후 변방으로 전락한 장기는 범속한 풍속을 가진,

    즉 기층문화를 가진 고을이었지만조선조 실세 정객과 학자들이 유배 와서

    중앙의 고급문화와최고 수준의 학문(儒學)을 유포해 유향(儒鄕)으로 변화했다.

    그런 영향으로 동일지역 내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창건되었다.

    장기는 비록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바닷가 작은 고을에 불과했지만

    중앙의 학식과 지조를 갖춘 학자와 정객, 그리고 좋은 서적들을 접하면서

    지식과 문화 교류를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고,

    이렇게 얻은 지식과 정보를 슬기롭게 소화하여 충절과 유향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다.

    유배인들은 고난 속에서도 서책을 탐독하고 시문과 저서를 쓰고,

    지역 선비들을 교육시켜 유배문화라는 독특한 문화를 남겼다.

    이들의 영향으로 장기는 학문을 중히 여기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조성되었고, 이런 풍토는 은연 중 학자 내지는

    관직 지향적 문화를 만들어 그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유배과정(流配過程)

     

    유배길의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고

    개인적으로 노비(奴婢)를 거느릴 수가 있었다.

    유배인은 관직자일 때에는 국가에서 말(馬)을 지급하고,

    유배 길목의 수령들은 말과 음식을 제공하도록 허용했다.

    그래서 재산이 넉넉지 못하거나 동료 친인척이 많지 않은

    양반 관료들인 경우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선조 24년(1591) 정철이 실각하자 그 일파로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된

    홍성민의 경우를 살펴보면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타고 갈 말 여섯 필과

    의식을 장만하는데 가산을 털어야만 했다.

    유배인들은 대개 말을 타고 이동을 하는데,

    며칠 만에 유배지에 도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하루에 평균 80리~90리를 가도록 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사례는 일률적이지 않았으며 신분 및 위리안치 여부에 따라 거리의 가감이 있었다고 한다.

     

     

     

    다산(茶山)의 유배생활(流配生活)

     

    정약용의 유배지, 장기

    ○ 다산은 1801년 1월 19일에 터진 ‘책롱사건(冊籠事件)’,

    즉 신유박해(辛酉迫害)라고도 부르는 천주교 박해사건에 연루돼 장기로 유배되었다.

    1801년 3월 9일 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마현리 ‘구석골’ 늙은 장교 성선봉 집에서 기거했다.

    그해 10월 20일까지 7개월 10일(220일)동안 장기에 머문 다산은

    인간으로는 가장 불행한 귀양살이 기간이었지만 불굴의 투지로

    고통과 좌절을 극복하며 학문연구와 시작에 전념했다.

     

    ○ 다산은 220일 동안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고시 27수’ 등

    60제(題) 130여 수에 달하는 주옥같은 시를 창작했고,

    서인과 남인의 예론(禮論) 시비를 가린 ‘기해방례변’, 한자 발달사에 관한 저술인 ‘삼창고훈’,

    한자 자전류인 ‘이아술 6권’ ,불쌍한 농어민의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기 위한 ‘촌병혹치’ 저술,

    그리고 아들에게 보낸 3통의 편지 등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답게

    가히 초인적인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 ‘기성잡시 27수’에는 장기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눈에 비친

    당시 장기의 모습들이 그림 그리듯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다산은 처음에는 장기의 모습과 풍물들을 묘사하다가

    차츰 그들의 삶 속에 있는 풍속과 애환을 그리는 데로 나아갔고,

    그 속에서 백성의 가난을 발견하고, 가난의 원인이

    당시 사회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함을 밝히려 애썼다.

    그러면서 이곳 사람들의 애환과 관리들의 부패상을 우화적이고

    은유적인 시로 표현했는데, 그 대표적인 시가 ‘장기농가 10장’이다.

     

    ○ 다산은 또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이를 ‘수오재기(守吾齋記)’라는 글로 남겼고,

    나아가 자신의 내면에 일어난 회오와 억울함을 드러내기도 하고,

    정조와의 끊을 수 없는 그리움에 잠기기도 했다.

    다산은 자신보다 126여 년 전에 장기로 유배왔던 우암과는 대조적인

    귀양살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배소에는 주인 외에는 거의 인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자취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산의 유배길

    ○ 다산은 석우촌 – 사평 – 하담 – 탄금대 – 무교 – 조령 – 함창 – 경주 - 장기로 이어지는

    유배 길마다 자신이 보고 느낀 생각과 감회를 시로 남기며 유배지에 도착했다.

     

    ○ 당시 장기현 관아는 지금 읍성 안의 장기향교 바로 옆자리였을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산은 다음 날 저녁 무렵에 관리를 따라

    장기읍성 동문으로 나와 마산리 구석골 늙은 장교 성선봉(成善封) 집을 거처로 삼았다.

    당시 다산이 관리를 따라 나왔던 동문은 지금 장기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조해루(朝海樓)라는 문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 다산이 관리를 따라 내려온 길은 지금도 거의 남아 있는 상태이다.

    장기향교에서 동문을 거쳐 면사무소로 내려가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걸어 다닐만한 돌 비탈길이 여전히 남아 있어

    다산의 유배 길을 걸어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고시 27수(古詩 27首)

     

    가지 늘어진 정원 속의 대나무 冉冉園中竹(염염원중죽)

    말쑥한 자태 너무나도 소박한데 修節擢澹素(수절탁담소)

    지방사람들 대가 중한 줄 모르고 土人不重竹(토인불중죽)

    대 베어 채마밭 울타리 만든다네 伐竹爲樊圃(벌죽위번포)

    네가 북쪽 지대에만 났더라면 苟汝生北方(구여생북방)

    사람들이 왜 널 사랑하지 않으리 豈不人愛護(개불인애호)

    잎 하나라도 혹시 다칠세라 一葉疑有損(일엽의유손)

    갔다가도 다시 와서 보살피련만 旣去復來顧(기거복래고)

     

     

     

    다산의 배소(配所)

     

    ○ 다산은 장기에 도착한 다음날인 1801년 3월 10일부터 마산리(馬山里:현 마현리)

    구석골에 사는 늙은 장교(莊校) 성선봉(成善封)의 집을 배소로 정하여 있게 됐다.

    * 다산은 영조 38년(1762)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馬峴)에서 태어났다.

    그후 40년 만에 다시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과 뜻을 가진 마현으로 귀양살이를 왔다.

     

    ○ (향토사학자 금낙두 선생에 의하면) 다산의 배소였던 성선봉 집은

    현재의 장기초등학교 뒤편 언덕으로 대숲에 둘러싸여

    지금은 길조차 분간하기 힘든 곳에 위치하고 있는 폐가로,

    추정하기는 힘들지만 이 일대가 다산이 머문 곳일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

     

    아내 홍씨에게 받은 낡은 치마에 딸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축원하는 매조도(梅鳥圖)와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담은 시와 이를 만든 사연을 적었다.

     

    翩翩飛鳥(편편비조) 훠얼 훨 날아 온 새가

    息我庭梅(식아정매) 내 집 뜰 매화나무에서 쉬는구나.

    有列其芳(유열기방) 그윽한 그 향기가 짙기도 하여

    惠然其來(혜연기래)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구나.

    爰止爰棲(원지원서) 여기에 머물러 깃들어 지내며

    樂爾家室(낙이가실)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

    華之旣榮(화지기영) 꽃이 이제 활짝 다 피었으니

    有蕡其實(유분기실) 열매도 주렁주렁 많이 달리겠네.

     

    嘉慶 十八年 癸酉 七月十四日 洌水翁書于茶山東菴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 가경 18년 계유(1813년) 7월 14일에 열수(洌水, 다산의 호) 늙은이는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내가 강진서 귀양산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에 홍부인이 낡아 헤진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다.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이를 잘라 네 첩으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었다.

    그 나머지를 이용하여 작은 가리개를 만들어 딸에게 보낸다.

     

    * 장기와는 상관없는 것인데(1813년 강진에서 지음)

    우암의 제문과 격을 맞추기 위해 올린 듯하다.

     

     

     

    유배(流配)와 장기(長䰇)

     

    장기는 신라 때는 지답현(只畓縣)인데, 남으로는 경주의 감포 경계까지

    북으로는 현재의 구룡포와 호미곶까지 관장하던 동해안의 중심지역이었다.

    관내에는 신라 말에 설치한 시령산성. 만리성 등의 고대 산성들과

    고려 현종 2년(1011년)과 조선 세종 21년(1439년) 쌓았다는 장기읍성(長䰇邑城)이 있다.

    장기는 조선시대 유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형벌제도로 유배형이 실시되고 세종 때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이 정비됨에 따라장기는 경성(京城)에서

    유3천리의 빈해(瀕海, 서울에서 30개 역 밖에 있는 바닷가 고을)

    지역에 해당되어 유배지로 자주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장기로 유배가 결정된 유배인은

    모두149회 211명(남자 172명. 여자 39명)으로 확인된다.

    이는 단일 현(縣)지역 유배인 수로는 국내에서 제일 많은 숫자이다.

    조선시대 유배 형기(刑期)는 원칙적으로 종신형이었으며,

    정치범으로 단죄된 유배자는 임금의 사면이나 권력의 변화,

    정세의 변동이 없는 한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하였다.

    대부분 왕의 사면이나 정세의 변동으로 다시 되돌아가

    정계에 복귀하여 승승장구한 사람들이 많으나

    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홍처럼 이곳에서 객사한 유배인도 있고,

    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처럼 끝까지 복권되지 않아

    지역민으로 살다가 한과 애환을 품은 채 죽어간 사람들도 있다.

     

     

     

    형벌제도로서 유배(流配)

     

    유배는 죄인을 멀리 귀양 보낸다라는 뜻이지만, 유(流)와 배(配)는 서로 의미가 다르다.

    流는 아주 먼 곳으로 보내 살게 한다는 뜻이며,

    配는 자유로이 할 수 없도록 어느 곳에 짝지어 배속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 세종 12년에는 전국적으로 유배지를 단축하고 혹은 우회하여 도착시키는 식으로

    변용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을 정비하였다.

    이에 따르면 장기는 경성(京城)을 중심으로

    유3천리 지역에 해당하는 빈해객관(濱海各官)에 해당되었다.

    조선 후기 의금부에서 죄인의 배소를 지정한 곳을 기록한 ‘의금부노정기’에도

    장기를 유배지로 지정함으로써 이곳이 조선 내내 유배지로 널리 활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장기로 오는 유배길은 한양 – 남태령 – 안성(죽산) - 충주 – 문경 –

    상주 – 함창 – 의흥 – 신령 – 영천 – 경주 - 장기로 연결되는 영남대로를 이용했다.

    이 길은 서울에서 860리이고 하루에 95리를 걸어 9일 반이 걸려야 도착하는 긴 여정이었다.

    유배인이 유배지에 도착하면 그 다음부터는 지방수령인 장기현감이 모든 책임을 떠맡게 된다.

    배소(配所) 및 그들을 맡아 보살펴 줄 보수주인(保授主人)을 정하고

    유배인에 대한 정기적인 감시를 한다.

    정기적인 감시를 점고(點考)라 하는데, 현감이 한 달에 2회씩 점고를 하여

    유배인의 상태를 확인하며 관리를 하였다.

    유배인을 맡은 보수주인은 주로 지역의 아전이나 군교, 관노 또는 지역의 유지들이 맡았다.

    우암 송시열의 보수주인은 정기에서 오랫동안 선비로서 터를 일구어 온 오도전(吳道全) 이었고,

    다산 정약용은 군교 출신인 성선봉(成善封)을 보수주인으로 삼았다.

     

     

     

    조선 최고의 논객(論客)을 품었던 장기(長䰇)

     

    사화와 당쟁의 소용돌이에 치여 세력을 잃고 불우한 운명으로 유배된 관리 중에는

    학문·사상적으로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고난 속에서도 서책을 탐독하고 시문을 짓는 등 창작활동은 물론

    지역에서 인재들을 양성하여 유배지에 독특한 유배문화를 남기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같은 석학에서부터 영의정에 이르는 관리들까지

    수많은 현량(賢良)과 학자들이 머물다 간 장기가 그 대표적인 곳이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장기에 머물면서 결코 유배지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여기지 않고

    학문연구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였고, 그가 목민심서를 저술하는데도 큰 계기가 되었다.

    그보다 120여 년 먼저 온 우암 송시열은 4년여 간 장기에 머물면서 남인 세력들이 득세한

    경상도에 노론계의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후학양성에도 힘을 썼다.

    이곳을 거쳐 간 유배인들의 영향으로 장기는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조성되었다.

    비록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작은 고을이었지만 중앙의 올곧은 관리들과

    좋은 서적들을 접하면서 지식과 문화교류를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배문화를 이어받아 장기면은 서원이 17개로 경북에서 가장 많은 고장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경주성 탈환에 일조를 한 이대임, 서방경, 서극인 등과 같은 의병장,

    장헌문, 정치익 같은 구한말 의병, 애국지사 엄주동 같은 선열들이

    이런 사상적 토대 위에서 배출될 수 있었다.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사적비와 충효관을 건립하고,

    우암이 직접 심었다는 330여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보듬으면서

    그때의 사실과 정신을 일깨워 온 이곳 사람들 특유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역사의식은 현재까지도 살아서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장기면의 유배문화 영향으로 후세에도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글 이상준,이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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