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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 산루리의 독립영웅들
    국내 나들이/박물관(博物館) 2021. 7. 29. 04:02

    수원 산루리의 독립영웅들

     

    수원이 낳은 독립운동가 이선경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수원박물관에서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다.

    '산루리의 독립운동가' 특별전시는 수원의 유관순이라 할만한 산루리 출신의 이선경과

    그의 자매들이 독립운동에 나선 배경과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산루리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펼친 영웅들을 재조명하기 위한 전시회이기도 하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창룡대로 265 (이의동) 수원박물관 031-228-4150

    수원박물관 swmuseum.suwon.go.kr/

     

     

     

    독립운동가 이선경 순국 100주년 기념 테마전

    산루리의 독립영웅들

     

     

     

    전시 개요

     

    1921년 4월 21일 만 19세 여학생 이선경(李善卿, 1902~1921)은 가족들 곁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수원 구국민단 활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풀려난 지 9일 만의 일이었습니다.

    올해는 이선경이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희망으로 가득한 꿈을 꿀 나이에 독립을 위해 투신한 그녀의 짧은 생은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맞바꾼 숭고한 희생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원 중동, 교동 등 팔달산 밖 마을을 조선시대에는 ‘산루동(山樓洞)’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수원화성(水原華城) 화양루(華陽樓)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다락골’로도 불렸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배와 함께 수원의 전통마을은 그들의 편의대로 재편되면서 산루리가 되었습니다.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리며 살아온 산루리 사람들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이선경 역시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수원박물관은 개관 이래로 이선경을 비롯한 10여 명의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 행적을 밝혀,

    독립유공자로 추서 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이번 테마전이 수원 산루리 독립영웅들의 숭고한 정신과 희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수원 3.1 운동 전개 과정

     

     

     

    이선경(李善卿, 1902.5.25.~1921.4.21.) *애국장

     

    목숨과 맞바꾼 조국 독립의 염원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나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한

    ‘구국민단(救國民團)’을 박선태 등과 결성하여 비밀리에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가석방된 뒤 19살 나이에 순국하였다.

    * 이선경의 사진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초상화는 언니 이현경을 모티브로 그린 상상화다.

     

     

     

    이현경(李賢卿, 1899~미상)

     

    새로운 세상을 꿈꾼 선각자

    이선경의 언니로 성공회의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한 뒤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1년 3.1 운동 2주년에 도쿄 하비야 공원에서 유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다 녹고를 치렀다.

    무산계급의 해방과 여성에 대한 인습적, 민족적 압박의 철폐를 주장한

    ‘삼월회(三月會)’와 ‘근우회(槿友會)’, 조선여성동우회 등에서 활동했다.

     

     

     

    이병억(李秉億, 1879.8.23.~1973.1.24.) *애국장

     

    하와이 노동이민에서 독립운동가로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나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갔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서 기숙사를 설치하고, 문맹퇴치 운동과 자치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미주 본토로 이주하여 192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이승만의 독립노선을 지지하며

    나성한인교민단(羅城韓人僑民團)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했다.

    이후 나성동지회를 조직하고, 1944년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이승만의 활동과 정치노선을 적극 후원하였다.

     

     

     

    김장성(金長星, 1913.2.7.~1932.3.9.) *애족장

     

    수원소년동맹의 화신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나 수원청년동맹 산하의 수원소년동맹의 맹원이었던

    홍종근(18세)과 1930년 10월 12일이 화성학원의 운동회가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무산대중에게 격함, 노동자 농민은 일치단결하자,

    조선총독부 폭압정치를 타도하자’를 외치며 격문을 살포하였다.

    격문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만기출옥을 20여 일 앞두고 가출옥한 뒤 1개월 만에 순국하였다.

     

     

     

    차계영(車啓榮, 1913.9.25.~1946.6.10.) *애족장

     

    일본 제국주의 반대를 외친 혁명가

    수원면 남창리가 본적이나 상루리에서 태어나

    조선총독부 급사로 취직하여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독서회 산하에

    ‘적우회(赤友會)’를 만들어 활동하다 수원에서 체포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경성제국대학 반제동맹 사건과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사건으로 3번에 걸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노적(金露積, 1895.5.12.~1963.6.1.)

     

    수원 3.1 운동을 이끈 핵심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나 수원상업강습소를 졸업하고

    민족 대표 김세환과 함께 수원 3.1 운동을 이끌었다.

    체포된 뒤 심한 고문과 구타로 왼쪽 손을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

    이후 수원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화성학원 교사로 활동했다.

    조선소년군 수원 제8대 대장으로 소년운동을 지도하고,

    신간회 수원지회장을 역임하면서 수원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박선태(朴善泰, 1901~1938) *애족장

     

    나라를 구하고자 선봉에 나선 구국민단 단장

    수원면 산루리 출신으로 휘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삼일학교 교사 이종상을 만나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펴기로 하고, 1920년 6월 20일 비밀결사 ‘구국민단(救國民團)’을

    조직하여 단장으로서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뒤에도 수원청년회, 수원체육회,

    신간회 수원지회 등에서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이용성(李容成, 1906.4.3.~1974)

     

    수원청년운동의 활동가

    이현경과 이선경의 동생으로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 수원으로 돌아와 수원청년동맹에서 체육부장으로 활동하고, 화성학원 교사,

    수원시체육회의 위원, 신간회 수원지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해방 이후 수원시의회 시의원으로 활동하였고 의장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 산루리(山樓里)

     

    산루리는 지금의 수원시 중동, 교동, 영동 및 구천동 일대를 일컫는 옛 지명이다.

    수원화성(水原華城)이 축조된 이후 팔달산 아래 신읍치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산루리는 팔달문 밖 팔달산의 서남 자락을 끼고 형성된 마을로

    산등성이 아래에 위치하여 ‘다락골’이라 불렸다.

    또한 화성 축성 당시 서남쪽 방비를 위해 용도(甬道)를 내고

    서남각루를 지으면서 화양루(華陽樓)라 하였는데,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이어서 자연스레 ‘산루(山樓)’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문헌 기록으로는 19세기에 만들어진 ‘화성지(華城誌)’ ‘방리(坊里)’조에서

    ‘산루동(山樓洞)’이 확인되었다.

     

     

     

    산루동 전경(山樓洞 全景)

     

    1907년 / 국립민속박물관

    정조(正祖)의 화성 건설과 상업 진흥책으로 팔달문 밖에 남문외장(南門外場),

    즉 문밖 시장이 형성되면서 문밖 마을이 활성화되자

    산루동의 교통의 중요한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독일인 헤르만 산더가 1907년 수원을 방문했을 때 찍은 것으로

    팔달문과 남공심돈 바깥쪽으로 산루동 민가들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지(華城誌)

     

    1800년대/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읍지(邑誌)’ 제6책에 수록된 수원읍지다.

    수원부지도(水原府地圖)와 화성전도(華城全圖), 수원화성(水原華城)의

    전체 규모와 주요 시설물에 대한 내용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팔달산 주변을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나누었는데,

    남부에는 남창동(南昌洞), 남수동(南水洞), 매향동(梅香洞), 구천동(龜川洞),

    교동(校洞)과 함께 산루동(山樓洞)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초창기 수원역(草創期 水原驛) - 일제강점기

     

    경부선 개통 당시 세워진 초창기 수원역이다.

    초기 투자 비용이 부족했던 일제는 나무 건물로 역사(驛舍)를 만들었다.

    역사 앞에는 손님을 태우기 위해 대기하던 자동차와 인력거(人力車)가 즐비했다.

    경부철도 개통과 수원역이 설치되면서 인근 지역으로 일제의 식민기관과 자본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경부철도주식회사창립사무소 통지서(京釜鐵道株式會社創立事務所 通知書)

     

    1901년 / 수원광교박물관

    경부철도주식회사 설립을 위한 주식 모집 결과 및 배당 주식 수를 알리고,

    그에 대한 불입금 납부를 통지하는 내용이다.

    경부철도주식회사는 경부선 설립을 위해 1901년(광무 5) 6월에 설립된 사유철도회사로

    1905년(광무 9) 1월 1일 경부선을 완공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정책 수행에 앞장섰다.

     

     

     

    만한철도 창가(滿韓鐵道 唱歌)

     

    1906년 / 수원광교박물관

    오와타 다테키(大和田建樹, 1857~1910)가 경의선이 개통되던

    1906년(광무 10) 4월에 발행한 창가집이다.

    철도 선로를 따라 주요 역의 경치가 창가와 사진으로 소개되어 있다.

    수원지역은 서호(西湖)의 사진과 함께 풍경을 노래한 창가가 실려있다.

     

     

     

    이토 히로부미 수원방문기념사진(伊藤博文 水原訪問記念寫眞)

     

    1907년(광무 11년) 3월 26일 수원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현 농촌진흥청) 인근의

    항미정(杭眉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와 그 일행들이 찍은 기념사진이다.

    초대 조선통감(朝鮮統監)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무력으로 장악한 군부 실세인

    조선총독(朝鮮總督)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 육군대장을 전별하기 위해

    수원에 내려와 권업모범장, 수원공립보통학교(水原公立普通學校, 현 수원신풍초등학교),

    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 현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를 시찰하였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6월 14일 조선통감 임기를 마치고

    그해 10월 26일 중국의 하얼빈역(哈爾濱站)에서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저격돼 죽었다.

     

    1907년 병합기념조선사진첩(倂合記念朝鮮寫眞帖) - 수원광교박물관

     

     

     

    1917년 수원지도 일부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1917년 제작한 수원 지도다.

    축척과 등고선, 부호를 사용하여 수원 내 각종 시설과 전답, 도로와 철도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수원역에서 팔달문까지 이어진 새롭게 만들어진 신작로(新作路)에

    수원거류민립소학교(水原居留民立小學校, 현 매산초교),

    동양척식주식회사 출장소(東洋拓殖株式會社 出張所), 동산농장(東山農場),

    수원사(水原寺) 등 일본인을 위한 학교와 사찰, 경제침략기구가 생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구 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 일람

    (新舊對照 朝鮮全圖 府郡面里洞 名稱一覽)

     

    1917년 / 수원광교박물관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조치는 1913년부터 준비되어 1914년 3월 1일부로

    부(府).군(郡) 통폐합 조치가 시행되었고, 면의 통폐합은 1914년 4월 1일을 기해 시행되었다.

    동리의 통폐합은 도별로 진행시키며 1918년 토지조사사업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통폐합된 수원면은 남창리, 남수리, 산루리, 매산리, 북수리, 신풍리로 조정되었고,

    군청소재지는 신풍리였다.

     

     

     

    면(面)의 명칭(名稱) 및 구역(區域)

     

    1914년 / 수원광교박물관

    1914년 4월 1일 개편된 조선의 지방행정구역을 정리한 책이다.

    일제는 지방에 대한 식민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군(郡) 면(面) 단위의 행정구역을 일방적으로 통폐합하였는데,

    이는 실제 생활권을 고려하지 않고 식민지배의 행정 편의를 강조한 것으로

    조선의 전통적인 자치조직을 무력화시키고 행정기관 강화를 기본으로 하는

    지방지배체제의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기존의 산루동, 교동, 구천동은 이 통폐합 조치로 산루리로 통합되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수원지도

     

     

     

    부국원(富國園) - 일제강점기

     

    부국원은 1914년 수원역사에서 영업을 시작한 일본인 종묘회사다.

    종묘, 종자와 농기구, 비료, 농산물 등을 판매하며 식민 농정의 한 축을 담당했다.

    부국원 건물은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 제698호로 지정되었다.

     

     

     

    산루리 삼 남매의 독립운동

     

    산루리 출신 중에서도 광주이씨 집안의 삼 남매인 이현경(李賢卿, 1899-?),

    이선경(李善卿, 1902-1921), 이용성(李容成, 1906-1974)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현경은 1920년 학생들의 비밀결사조직인 구국민단 활동 중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921년 4월 21일 가족들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현경은 일본 유학 중 1921년 3월 1일 동경 하비야 공원 만세시위를 벌이다 붙잡혔는데,

    그녀는 동생의 비통한 소식을 구금당한 상태에서 접해야 했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이현경은 여성단체 근우회 설립을 주도하다가 여의치 않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용성은 1930년대 수원체육회와 수원청년동맹 등

    당시 수원에서 벌어진 민족적 사회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적십자 간호부 사진

     

    1920년 / 독립기념관

    1920년 대한적십자회 제1기 간호원 양성 기념사진이다.

    대한적십자회는 1905년 조직되었다가 1909년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적십자회에 통합되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 직후 1919년 8월 29일 임시정부 내무부령 제62호에 의해

    상해에서 대한적십자회가 재창립되었다.

    구국민단의 이선경, 임효정(임순남), 최문순 등 여성단원들은 상해임시정부 적십자회에 들어가

    간호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도울 것을 맹세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해판 독립신문(上海版 獨立新聞)

     

    1920/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구국민단은 서울에서 구해온 상해판 독립신문을 수원지역에 배포하여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상해판 독립신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념과 활동을 전파하고,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을 구내외에 알리기 위해 간행되었다.

    19206월 2424일 자 제86호는 총 4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립군 기사, 안중근 관련 기사, 독립군의 적경 주재소 습격 등과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선경 순국지로 추정되는 수원역 앞(1970년대)

     

     

     

    수원 산루리의 독립영웅들

     

    일제의 식민지배에 억눌려 있던 수원사람들의 분노는

    1919년 3.1 운동을 기폭제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3.1운동 이후에도 학생들의 비밀결사 조직, 각종 사회단체들의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

    노동자와 농민들의 투쟁, 항일 격문 배포 등이 해방을 맞는 순간까지 격렬하게 이어졌으며,

    그 중심에 산루리 독립영웅들이 있었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수원의 3.1운동을 주도한 김세환(金世煥, 1889~1945),

    김세환을 도와 3.1운동을 이끌고 수원 신간회 및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김노적(金露積, 1895-1963),

    구국민단 단장으로 활동했던 박선태(朴善泰, 1901-1938),

    수원 곳곳에 격문을 붙여 조국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킨 김장성(金長星, 1913-1932),

    사회주의 활동으로 세 번이나 검거되었던 차계영(車啓榮, 1913-1946),

    총독 암살을 계획했던 조득렬(趙得烈, 1910-1961), 조국의 독립을 꿈꾼 강성문(姜聖文, 1924-?), 

    김길준(金吉俊, 1923-?), 차준석(車濬晳,1922-?)과

    1902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주 독립운동에 나선 이병억(李秉億, 1879-1973) 등

    수많은 산루리의 영웅들은 일제의 폭거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별나라 속간 창간호

     

    1945년

    안준식(安俊植, 1901~1951)이 경영하는 동아인쇄소에서 발간한 소년소녀잡지다.

    ‘별나라’ 관계자들은 조선플로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을 비롯한 사회주의 성향을 띤 사람들이 많았다.

    정청산은 1930년 12월 동아인쇄소 사무원으로 취직하였는데,

    안준식과는 수원 오산 출신이라는 연고와 사상적 동지라는 공통점으로 인연을 맺었다.

    정청산은 녹수(綠水)라는 호와 정재덕(鄭在德), 정철(鄭哲)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면서

    ‘별나라’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는다

     

    수원박물관은 2009년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의로운 기생 김향화와

    2010년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이선경의 구국민단(救國民團) 독립운동 행적과

    순국 사실을 밝혀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그리고 2017년 7월부터 2018년 3월까지 8개월 동안 수원학 연구센터와 함께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경기도 독립운동 인물 발굴 사업’을 벌여 수원 출신 및 거주자 등의

    독립운동 자료를 수집하고 검토하여 최종 113명의 독립운동 행적을 정리하였다.

    2019년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 113명 중

    우선적으로 15명을 국가보훈처에 포상 신청하여 2020년 광복 75주년을 맞아

    9명이 정부포상을 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수원박물관은 수원지역 독립운동가들을 밝혀내는 작업과 함께

    기억하고 기록하는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현재에도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알지 못하거나

    후손 확인이 안 되어 세상에 묻혀있는 분들이 너무도 많다.

    역사는 기록이다. 기록을 통해 기억하며 기념한다.

    역사는 잊어버리는 자의 몫이 아니라 기억하는 자의 몫이고,

    기억하는 역사는 오늘의 삶과 미래를 여는 삶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임면수(林勉洙, 1874.6.13.~1930.11.29.) *애족장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가이자 독립운동가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근대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삼일학교 설립자이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중국 만주로 건너가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독립운동기지의

    경기도 대표로 활동하며 개척사업과 신흥무관학교 개설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설립된 민족양성중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양성에 기여하였다.

    1910년대 중반에는 부민단의 결사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며,

    3․1 운동 이후 통화현에서 해룡현(海龍縣)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체포 투옥되었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담스기념관(Adams記念館)의 공사감독을 하는 등

    고향에 대한 사랑과 학생들의 미래를 위한 교육에 헌신을 다하였다.

     

     

     

    차인재(車仁載, 1895.4.26.~1971.4.7.) *애족장

     

    구국의 일념, 미국에서 꽃피다.

    수원 북수리 출신으로 나혜석, 박충애 등과 함께 삼일여학교 1회 졸업생이다.

    이후 이화학당을 거쳐 삼일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20년 박선태, 이득수 등이 조직한 구국민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대한여자애국단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또한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등

    LA(Los Angeles)에서 한국 여성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김향화(金香花, 1897.7.16.~미상) *대통령표창

     

    의로운 기생(妓生), 꽃 중의 꽃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수원 기생들은 고종황제가 돌아가심을

    누구보다도 슬퍼하며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하고,

    1919년 3월 29일 자혜의원(현 화성행궁 봉수당)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때 수원 기생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30여 명을 이끌고

    일제의 총칼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선경(李善卿, 1902.5.25.~1921.4.21.) *애국장

     

    ‘수원의 유관순’으로 순국한 소녀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나 수원공립보통학교(지금의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1 운동 당시 김세환의 밑에서 연락 임무를 담당하였다.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한 ‘구국민단(救國民團)’을 박선태 등과 결성하여

    비밀리에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살 나이에 순국하였다.

     

     

     

    조안득(曺安得, 1910~미상) *애국장

     

    우카키 총독을 겨냥하다.

    수원면 매산리에서 태어나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등학교)를 마치고

    인쇄 직공으로 근무하다가 1931년 2월 경성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인진명, 이금진, 윤락삼, 친형 조천복 등과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토론을 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되던 1935년 우카키 총독을 암살하고자

    사전에 폭탄을 제조하고 처단 예행연습을 하다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홍종철(洪鐘哲, 1920.3.26.~1989.7.22.) *애족장

     

    차별 없는 세상과 독립을 꿈꾼 청년

    수원면 인계리에서 태어나 1939년 10월 사회주의 청년 최용범, 차준철, 김길준, 맹승재,

    강성문, 용현식 등과 ‘수원예술호연구락부(水原藝術互硏俱樂部)’를 결성하였다.

    이들 청년들은 국내 및 만주, 동경의 독립운동가와 연계하여

    식민통치 체제의 비판, 민족차별과 조국독립, 공산주의 사회제도의 실현 등을 위해 활동하다

    결국 체포되어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수원의 독립운동

     

    수원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저녁 화홍문 방화수류정(용두각) 아래에서 시작됐다.

    (이병헌, 3.1운동 비사, 1959년) 수원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의 서장대, 연무대,

    서호, 성 안팎의 장터, 일제의 관공서와 경찰서 등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졌고, 4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수많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 유학자, 그리고 농민, 상인, 학생과 기생들까지

    수원의 모든 사람이 참여하며 조국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

    수원은 3.1 운동이 대부분 사전 계획되어, 조직적이며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3.1 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에도 젊은 청년들은 ‘구국민단’을 결성하였고,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학생들의 비밀결사와

    사회주의 청년들의 수원청년동맹 결성, 수원예술호연구락부(水原藝術互硏俱樂部) 조직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지속하였다.

    또한 소작쟁의(小作爭議)와 노동운동으로 식민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으며,

    학생들의 낙서와 격문 사건, 조선총독 암살 계획, 부민관(府民館) 폭파사건 등

    해방 직전까지 조국 독립을 위한 항거를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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