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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세손서(諭世孫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9. 2. 19:18

    유세손서(諭世孫書)

     

    세로: 58.0cm, 가로: 121.5cm

    1776년(영조 52) 영조의 나이 83세에 왕세손이던 정조에게 은인과 함께 내린 유서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승정원일기》의 기사 삭제를 요청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정조의 효심에 영조가 감동하여 만들게 되었다.

    정조는 조회나 거둥 때면 늘 은인과 <유세손서>를 앞세웠다고 한다.

    ‘유세손서(諭世孫書)’에는 정조의 효성을 만세토록

    전하길 바라는 마음과 후계자에 대한 믿음을 적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아! 해동(海東)의 300년 (우리) 조선은

    83세의 임금이 그 25세의 손자에게 의지한다.

    오늘날 종통(宗統)을 바르게 하니, 나라는 태산 반석(泰山盤石)처럼 편안함이 있고,

    또 진달 한 글을 보니 말은 엄명하고 뜻은 정대하여 천세, 백세를 전할 수 있다.

    일기(日記)의 세초(洗草)는 실로 너의 뜻을 따른 것이다.

    또 듣건대, 어제 무덤 위에서의 행동에 대해 들은 사람은 눈물로 옷깃을 적실 만하였다.

    국초에 보인(寶印)을 만든 고사(故事)를 따라서 ‘지효[(至孝), 지극한 효성]’라 새겨

    너에게 주려 하였는데 네 스승 영상(領相)의 충성스러운 말이 나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명을 중지하기는 하였으나 그 행적을 어찌 후세에 민멸(泯滅) 되게 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하나의 ‘효(孝)’ 자로 그 마음을 금세(今世)에 드러내고

    그 일을 후세에 본보기로 삼는다면 비록 해동의 초목과 곤충일지라도 누가 모르겠는가.

    특별히 정전(正殿)에 임어(臨御)하여 선유(宣諭)하고 이어서 그 하례를 받는다.

     

    할아버지와 그 손자가 서로 의지하니 오늘날에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체득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삼백 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내 즉위 52년, 나이 83세에 25세 되는 내 세손에게 이르노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www.gogung.go.kr/

     

     

     

     

    은인(銀印)과 유세손서(諭世孫書)에 담긴 정조의 효심

     

    정조는 24세가 되던 해인 1776년(영조 52),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수은 묘(垂恩墓)에 다녀와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록을 삭제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죄인의 자식으로서

    더 이상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세손의 자리를 내놓겠다는 비장한 각오와 함께였다.

    영조는 정조의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승정원일기의 내용을

    삭제하라는 어명을 내리며 세손의 효심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록한 명령서인 유서(諭書)와 함께

    은인(銀印)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은인은 세손을 따라야 하는 것이니,

    앞으로는 세손이 거둥 할 때에 이 은인으로 앞길을 인도하도록 하라.”

     

    영조는 이 어명을 남긴 후 2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아버지의 불행한 죽음을 위로하고 자신을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자

    노력한 효손(孝孫)으로 인정해 준 할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평생 이 유서와 은인을 지니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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