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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淸白吏)의 재상(宰相), 맹사성(孟思誠)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0. 14. 19:12
맹사성은 시가와 음률에도 조예가 깊어 조선 태종과 세종대에
관습도감 제조로 음악을 정비하고 악인(樂人)을 교육하였다.
항상 피리(玉笛, 옥피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 서너 곡을 연주하였는데,
그를 찾아온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서 피리 소리를 듣고
그가 집에 있음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은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봉급으로 받은 쌀)로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소(牛) 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흑기총 설화(黑麒塚 說話)
흑기총은 맹사성과 검은 소(黑牛) 설화에 등장하는 검은 소의 무덤이다.
하루는 맹사성이 산에 오르던 중 아이들이 검은 소를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맹사성은 아이들에게 짐승이라도 생명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고 꾸짖고
마을로 내려가 주인을 찾았으나 헛수고였다.
이에 검은 소를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고, 검은 소는 맹사성을 잘 따랐다.
맹사성은 평생 가마 대신 검은 소를 타고 다닐 정도로 검은 소를 가까이하였다.
맹사성이 세상을 떠나자 검은 소는 사흘을 먹지 않고 울다가 굶어 죽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검은 소의 충심에 감동하여
맹사성의 묘 아래에 묻어주고 이를 흑기총(검은 영물의 무덤)이라 불렀다.
현재 흑기총은 경기도 광주시 직동에 있다.
청백리(淸白吏)의 재상(宰相), 맹사성(孟思誠)
고불(古佛) 맹사성(1360~1438)은 1360년(고려 공민왕 9년) 7월17일수문 전제학(修文殿提學)을 지낸 맹희도(孟希道)와 흥양조씨(興陽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창(新昌)이고 자는 자명(自明)·성지(誠之)이며 호는 고불(古佛)이다.
고려시대 최고의 무신인 최영(崔瑩) 장군의 손서(孫婿)이다.
1376년(우왕 2) 17세 무렵에 문과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후1386년(우왕 12)에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하여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여러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친 후 1392년 조선 건국을 맞이해 태조 때 예조의랑이 된다.
그리고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 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는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 동부대언(同副代言), 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으며1407년(태종 7)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 양녕대군’을 따라 시종관(侍從官)으로서 수행하여 다녀왔다.
1408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지평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태종의 차녀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결혼한 ‘사위 평양군 조대림’의 반역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하였다.
이 일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서 처형될 뻔하였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등 많은 신하가 극형을 반대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었다.그러자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인 맹사성이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다.
이어 그 이듬해에는 풍해도도관찰사(豐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고,이듬해엔 생원시에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權採) 등 100인을 뽑았다.
세종대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었으며
그해 늙은 아버지 맹희도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역마(驛馬)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인 아산 온양에 내려갈 것을 알렸으나세종대왕은 충청도도관찰사로 삼아 부친을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어 또다시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1419년(세종 1)에는 이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 의정부 찬성사를 역임하고 142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432년에 좌의정이 되었으며1435년(세종 17)에는 드디어 76세의 나이를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1438년(세종 20)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세종대왕은 자신의 스승인 맹사성을 조상을 치르기 위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매우 크게 슬퍼했으며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청백리(淸白吏)의 길, 고불 맹사성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 (중리) 고불 맹사성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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