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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정씨(羅州丁氏) - 대전 뿌리공원
    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21. 11. 25. 04:05

    나주정씨 문중 유래(羅州丁氏 門中 由來)

     

    나주정씨의 본관은 처음 압해(押海)이었다.

    압해현은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으로, 고려초에는 나주에 속한 현이였으나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으로 모두 나주로 철수하여 한때 무인도가 되자

    조선조 태종 9년(1409년)에 이르러서는 폐현이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나주정씨는 한동안 관적을 나주압해정씨(羅州押海丁氏)로 쓰다가

    영조 연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나주로 본관을 고쳐 오늘날까지 사용해오고 있다.

    고려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윤종(允宗)을 시조로 모신 우리 정씨는

    그로부터 6세 이르기까지 압해현의 토성(土姓) 호족으로 거주하다가

    7세손 원보(元甫)에 이르러 비로소 개경(開京)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수강(壽崗)은 성종 때 병조참판으로 문장이 뛰어나

    후세에 월헌집(月軒集)을 남겼고, 아들 옥형(玉亨)은 명종 때 좌찬성에 올라

    금천군으로 봉군되고,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그의 아들 응두(應斗)역시 좌찬성으로 시문에도 뛰어난 선비였고

    금계군으로 습봉(襲封)되고, 영의정을 추증받았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그의 윤조(胤祚), 윤희(胤禧), 윤우(允祐), 윤복(胤福) 네 아들 또한 모두 지방 관찰사, 대사헌 등

    고관을 지냄으로써 당시 수도 한양에서 명망 높은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숙종 때의 시한(時翰)은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성리학을 깊이 닦아 큰 학자가 되어서

    우담집(愚潭集)을 남겼고, 영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범조(範祖)는 문학에도 뛰어난

    해좌집(海佐集)을 남기고,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세인이 익히 아는 정조 때의

    다산 정약용(若鏞)은 형조참의까지 지냈으나 백서사건으로 인해 강진에서

    1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여 권의 권위 있는 저술을 남겼으며,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렇듯 나주정씨 문중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고,

    조선왕조에서 무려 4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9대 옥당(玉堂)의 가계를 이루었음은 참으로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1997년 7월 31일
    나주정씨 종친회(羅州丁氏 宗親會)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364 뿌리공원 內

     

     

     

    작품명 : 화합(和合)과 번영(繁榮)

     

    조각가 : 정해덕(홍익대학교 조소학과 졸업), 제작 참여 : 남기혁

    작품 설명 : 나주정(丁) 성씨 한자 형태를 위주로 하여

    왼쪽 구의 형태는 조상님의 얼을 표현하였고,

    전체적으로 후손들이 조상님의 얼을 받쳐드는 형상으로 표현함.
    기본 형태는 탑의 형태를 띠며 후손들의 화합과 번영을 표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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