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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宵海 張建相 先生 語錄碑(소해 장건상 선생 어록비)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7. 20:12

    宵海 張建相 先生 語錄碑(소해 장건상 선생 어록비)

     

    國家(국가) 大義(대의)를 爲(위)하고 民族發展(민족발전)을 위하여

    最善(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나의 政治的 理念(정치적 이념)이다.

    國民(국민)은 이에 對(대)하여 審判(심판)할 것이다.

    石田 九三翁 黃旭(석전 93옹 황욱)

     

    * 선생의 號(호) ‘宵海(소해)’란 '밤바다'라는 뜻이다.

     
     
     

    젊은이는 모름지기 自主的 情神(자주적 정신)이 강해야 한다.

    自立情神(자립정신)에 입각하여 앞날을 계획하고 현실에 대처해야 할 일이다.

    흔들리지 않는 自立情神에 근거하여 現實(현실)을 냉정히 심판하고 과단성 있게 활동하라.

    民族(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근본적으로 大局的(대국적)인 견지에서 역사의 장래를 바라보라.

     

    ‘事實(사실)의 全部(전부)를 記述(기술)한다’의 宵海 先生 回顧錄(소해 선생 회고록)에서

     

    1990年 5月

    題字(제자) : 石田 黃旭(석전 황욱, 1898~1992)

     
     
     

    장건상(張建相, 1888~1974)

     

    출생 : 경남 동래, 독립운동가·정치가.

    자는 찬성(贊成), 호는 소해(宵海).

    1908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중퇴하고

    1916년 미국 인디애나주립대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상하이[上海]에 있던 신규식으로부터 독립운동 참여를 제의하는 편지를 받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에 온 지 2년 만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임시정부 외교위원에 임명되었으며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차 파리로 떠나자 외교총장 대리를 역임했다.

    1922년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했고, 베이징[北京] 유학생 김성숙 등

    20여 명과 함께 항일투쟁을 고취하는 〈혁명〉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후 임시정부와 김구(金九)의 의열단에 참가했고

    1942년 충칭[重慶]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학무부장으로 활동했다.

    8·15 해방 후 귀국하여 1946년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의장,

    한·중문화협회 고문, 조선인민당 부당수, 1947년 근로인민당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1948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 정치협상차 평양에 다녀오기도 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56년 진보당 결성추진위원회 조직책을 맡았으며

    1961년 민족혁명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자료 출처 : 다음백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 (남화리)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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