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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손씨(密陽孫氏) - 대전 뿌리공원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21. 12. 28. 04:05
작품명 : 忠孝(충효)와 淸白(청백)의 氣象(기상)
조각가 : 朴壽用(박수용)
작품 설명 : 문효공(文孝公) 손순(孫順)의 석종(石鐘)의 기적과
의암(義巖) 손병희(孫秉熙) 선생의 애국정신을 현대적으로 조형화하였다.
효의 상징인 석종을 바탕에 두고 태극으로 문중의 뿌리와 기상을 표현하였고,
용의 힘찬 위용과 횃불은 자손만대의 영원함과 번영을 상징하며,
조상의 충효정신을 우렁찬 종소리에 실어 만세에 울려 퍼지는 기상을 나타내었다.
密陽孫氏 驛丞公派 建立(밀양손씨 역승공파 건립)
밀양손씨(密陽孫氏)의 유래(由來)
약 이천백 년 전 진한(辰韓)땅에 육촌(六村) 중 무산 대수촌장 구례마(茂山 大樹村長 俱禮馬)는
신라를 세운 원훈으로서 신라 3대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사성(賜姓)을 받으니
이분이 손씨(孫氏)의 원조(元祖)이시다.
법흥왕 23년에 충렬공(忠烈公)으로 시호를 받았고, 무열왕 3년에 문의왕(文義王)으로 추봉 되었다.
31세(世) 휘 순(諱 順)은 석종(石鐘)의 기적이 있어 효(孝)로 명성이 천추에 빛나
신라 흥덕왕 10년 을묘(835년)에 월성군(月城君)으로 책봉되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니
이분이 시조(始祖)로 다시 1세(世)가 된다.
문효공의 효행에 대하여는 삼국유사, 고려사, 효행록, 조선조의 삼강록,
여지승람, 명심보감 효행편 등에 수록되어 있다.
후에 관향이 셋으로 나뉘었으니 밀양(密陽), 평해(平海), 경주(慶州)이다,
관향을 밀양으로 한 분은 7세(世) 고려개국벽상공신(高麗開國壁上功臣)
삼중대광사도 광리군(三重大匡司徒 廣理君) 휘 긍훈(諱 兢訓)이며,
시호는 무열이니 전국 각지에 널리 번창하여 살고 있는 밀양손씨(密陽孫氏)의 관조(貫祖)이시다.
30세(世) 휘 화숙(諱 和叔)은 황강도 역승(黃江道 驛丞)이니
이태조 6년 정축(1397년)에 밀양에서 공주군(公州郡) 유등천면(柳等川面)으로
집을 옮겨 사시니 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 도마 변 내동이다.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어 6백여 년을 살아오고 있으며 역승공의 향사를 모시는
수정재(水晶齋)는 시 문화재 자료 제30호이며 대전광역시 서구 변동에 위치해 있다.
44세(世) 의암(義庵) 휘 병희(諱 秉熙)는 서기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선봉(先鋒)으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여 자주독립 국가임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온 겨레의 잠자는 혼을 일깨워 만세운동을 일으켜 민족단결을 다지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밀양손씨(密陽孫氏)는 충효(忠孝)와 청백(淸白)을 가문의 근본으로 삼아
열사(烈士)와 명경거유(名卿巨儒) 덕업문장(德業文章)과 충신효자(忠臣孝子)가
면면히 배출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기 1998년 戊寅(무인) 청명절(淸明節)
文孝公 48世孫 重培 삼가 짓고 長巖 李坤淳 삼가쓰다.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364 뿌리공원 內
삼국유사(三國遺事) - 제5권
흥덕왕대에 손순이 아이를 묻다.
손순(孫順을 古本에서 孫舜)은 모량리 사람으로서 아버지 학산(鶴山)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 풀팔이로 곡식을 얻어 노모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運烏)라 하였다.
손순에게는 어린아이가 있어 언제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지라
손순이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를 다시 얻을 수가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님은 굶주림이 심하시오,
허니 아이를 매장시켜 어머니를 배불리 드시도록 해야겠소" 하였다.
그리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산은 모량의 서북 쪽에 있다.) 북쪽들에 가서 땅을 파자,
석종(石鐘)이 나왔는데 매우 신기하여 부부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얼른 나무 위에 걸고 두드려보니 은은한 소리가 듣기에 퍽 좋았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 이상한 물건을 얻음은 필경 아이의 복인 듯하니
아이를 묻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자, 남편은 아내의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 들보에 매달아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흥덕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서쪽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리는데
그 청아함이 이를 데 없으니 보통 종소리와는 다르다. 속히 가서 조사 해오라" 하였다.
왕의 사자가 그 집을 조사하고 사실을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땅에 묻으려 하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다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아들을 묻으려 하자 땅속에서 석종이 솟아 나왔으니
곽거의 효와 손순의 효는 천지 사이의 거울이 된다." 하고는 집 한 채를 하사하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극진한 효성을 숭상했다.
손순은 예전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고 홍효사라 하였으며 석종을 모셔두었는데,
진성왕(眞聖王)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적들이 이 마을에 쳐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있다.
그 종을 얻은 자리를 완호평(完乎平)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지량평(枝良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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