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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 위봉산성(威鳳山城)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1. 28. 19:13

    위봉산성 서문지(威鳳山城 西門址)

     

    위봉산성의 성문터는 4곳 중 3곳이 확인되었으며

    유일하게 서문만이 반월형 아치 형태로 남아 있다.

     

     
     
     

    완주 BTS 힐링 성지 - 위봉산성

     

     

     

     

    위봉산성(威鳳山城) 및 태조암(太祖庵)

     

    위봉산성은 백두대간의 금남정맥이 장안산에서 소양의 도솔봉으로 내려와

    문필봉, 장대봉, 되실봉, 추줄산으로 이어지는 산세를 갖춘 능선에 성곽을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이란 명칭은 소양면 대흥리 위봉마을이 봉황이 둥지를 튼 형국에서 생겨난 지명이며,

    봉황이 새끼를 낳고 어미 2마리와 새끼 2마리가

    도솔봉, 문필봉, 되실봉, 장대봉으로 날아가 앉았다 하여 위봉이라 하였다.

    숙종 원년(1675) 전라감사 겸 부윤 권대재(權大載)가 위봉산성 내에 행궁을 조성하여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에 모셔둔 태조 어진을 옮기기 위한 목적으로 위봉산성을 축성하였다.

    위봉산성 내 위봉사 옆에 행궁과 위봉산성진을 설치하였는데

    지금도 행궁의 축대와 주춧돌은 제 위치에 남아있다.

    위봉산성 성벽 둘레는 약 8,539m, 성벽 높이는 1.8~2.6m이고

    성문은 서-동-북 성문 3개소, 암문 8개, 포루 12개, 장대 2개, 샘 45개, 방축 9곳, 염산 1곳이 있다.

    위봉산성에는 위봉사, 행궁, 내성창, 장대, 위봉진, 장교청, 군기고 등이 있었으며,

    군병들은 전주 이하 익산, 김제, 금구, 임실, 고산, 진안, 용안, 함열에 소속되어 있었다.

    위봉진의 수성장은 전주부 판관이 겸했으며, 산성별장 이하 군관, 병졸을 두었다.

    실제로 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 때 동학 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하자

    태조의 어진과 시조 위패를 위봉산성 안 행궁에 피난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안하였으나

    행궁을 조성한지 오랜 세월이 지나 퇴폐하여 위봉사의 대웅전에 임시로 옮겨 모신 적이 있다.

    되실봉 뒤쪽 위봉산성 밖에 위치해 있는 태조암은 위봉사의 산내 암자로

    1675년 위봉산성이 축조된 후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을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행궁을 세우고 그것을 봉축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설과,

    1359년(공민왕 8년)에 나옹화상이 창건했다는 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이전 이 근처에서 기도를 했으며

    왕위에 오른 후 이때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아 현재의 태조암 일대에는

    적어도 1630년대 이전에 이미 암자 형태의 불사가 다수 존재해 있었고,

    그 후 1675년 위봉산성의 축조와 함께 건립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도내 주요 유적지로 완주군에는 이곳 위봉산성, 위봉사,

    전주시에는 경기전, 오목대, 조경단, 만경대 암각서,

    남원시에는 황산대첩비지, 피바위, 여원치 마애불, 정산봉,

    완주군에는 위봉산성, 진안군에는 은수사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또한 설화.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대표적인 곳으로 완주군에 태조암,

    남원시에는 고남산 제단, 장수군에는 뜬봉샘, 임실군에는 상이암,

    순창군에는 만일사 등 열여섯 곳을 들 수 있다.

     

     
     
     

    사적, 위봉산성(威鳳山城)

     

    위봉산성은 숙종 원년(1675)부터 숙종 8년(1682) 사이에 쌓았고 순조 8년(1808)에 고쳐 지었다.

    돌로 쌓은 대규모의 산성으로 둘레는 약 8.6km, 높이 1.8~2.6m에 달한다.

    산성은 보통 변란기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시설이다.

    그러나 위봉산성에는 이외에도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모신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어진(御眞)과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공(李翰公)의 위패를 옮겨서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를 위해 산성 안에 행궁을 함께 만들었으며

    이외에도 위봉사, 내성장, 장대, 위봉진, 장교청, 군기고 등도 설치하였다.

    실제로 전주가 동학 농민군에게 함락되자 태조 어진과 위패를 이곳에 모셔왔다.

    하지만 행궁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어진과 위패를 행궁에 모시기에는

    마땅치 않아 일시적으로 위봉사 대웅전에 모셨다고 한다.

    현재 위봉산성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성벽과 여장, 총안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기록에 남아있는 성문터 4곳 중 3곳이 확인되었으며,

    이중 전주로 연결되는 서문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외에도 암문지 6곳, 포루지 13곳, 적의 움직임을 설피기 위해 높게 쌓은 장대터 두 곳을 비롯해

    성 밖으로 물을 빼기 위한 수구지 한 곳과 우물지 두 곳 등이 확인되었다.

     

    *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성가퀴

    * 총안(銃眼) : 몸을 숨긴 채로 총을 쏘기 위하여 성벽, 보루(堡壘) 따위에 뚫어 놓은 구멍

    * 암문지(暗門址) : 성벽에 누(樓) 없이 만들어 놓은 문이 있던 곳

    * 포루지(砲樓址) : 성에 포(砲)를 설치하여 쏠 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든 시설물이 있던 곳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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