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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고당(感古堂) - 조선 왕조의 두 왕비가 기거했던 건물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3. 15. 21:05

    행랑채(行廊)

     

    행랑채는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

    신분이 가장 낮은 하인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나 곡식을 저장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조선시대 상류 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연령별로 공간을 분리했고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지는 가족생활을 고려해 공간을 배치했다.

     
     
     
     

    사랑채(舍廊)

     

    사랑채는 남자 주인과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니다.

    행랑채와 중문채 사이에 자리하고 대청, 사랑방, 누마루로 구성됐다.

    사랑채는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거나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자녀들에게 학문을 교육하는 장소였다.

    또한, 사대부 남자들이 사랑채에 모여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시를 짓고,

    거문고 등 악기를 연주하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했던 장소다.

    이렇듯 유학을 장려하고 문필 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했던

    조선시대에는 사랑방 문화가 발달했다.

     
     
     
     

    중문채

     

    안채 사랑채 사이에 위치한 중문채는 중간계층인 청지기 등이 거처했던 곳이다.

    또한 쌀, 김치, 장작 등을 보관하는 공간으로도 활용했다.

    안채의 부속건물로 안채와 사랑채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여성의 거주공간인 안채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기능을 한다.

     
     
     
     

    안채 주련(柱聯)

     

    주련의 글은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이 쓴

    명성황후 국장(明成皇后 國葬) 만장(挽章)을 참고했다.

    감고당(感古堂)은 비록 개인의 집이지만 어필 편액이 걸려 있었고,

    인현왕후와 명성황후의 정한과 애환이 서린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에 서예가 전기중(田琦重) 작가는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받는

    당나라 시대의 안진경(颜眞卿) 서체를 바탕으로

    여주의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高達院 元宗大師 慧眞塔碑)’의

    간결한 서체를 섞어 오랜 시간을 연습한 후 휘호했다.

     

    * 장지연 :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주장한

    ‘시일야방대성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 만장(輓章, 挽章) :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

     

    생장단강예가(生長丹江禮家) 단강의 법도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

    지절승습정훈(持節承襲庭訓) 지조와 절개 가정의 가르침 배우셨네

    일시음폐은광(一時陰蔽隱光) 한때 음기에 가려 그 빛이 숨었으나

    운권일월랑휘(雲捲日月朗輝) 구름을 걷어내고 해와 달처럼 빛나셨네

     

     
     
     

    안채

     

    안채는 몸채, 내당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안방, 대청, 건넌방, 윗방, 다락, 부엌 등으로 구성된다.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있다.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주택 실내공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에 있으며,

    출산과 임종 등이 이뤄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이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있는데

    이는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제한하던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공간배치라고 볼 수 있다.

     

     
     
     

    감고당(感古堂)

     

    조선 왕조의 두 왕비가 기거했던 건물이다.

    숙종의 계비(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가

    장희빈(張禧嬪)과의 갈등 속에서 물러났다가 복위될 때까지 5년여 동안 살았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년(고종 3년) 왕비로 간택, 책봉되기 전까지 머물렀다.

    감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이란 편액을 하사한 후부터다.

    원래는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쌍문고등학교 신축 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2006년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던 여주시가 현재 위치로 이전, 건축했다.

    여러 차례 수리하고 이전하면서 감고당의 본래 모습이 변형됐지만

    조선시대 중부지방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구조 형태를 보여준다.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 (능현동) 명성황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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