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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국인 안중근(大韓國人 安重根)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2. 4. 22. 21:10

    대한국인 안중근(大韓國人 安重根)

     
     
     
     

    志士仁人 殺身成仁(지사인인 살신성인)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라는 뜻의 이 글씨는

    1910년 3월 하얼빈 의거로 뤼순감옥에 투옥돼 있던 안중근 의사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해 남긴 유묵에 담긴 말이다.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속을 태운다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 동상 건립 범국민운동본부 총재 정갑윤 외

    동상 건립 2015년 11월 11일

     

     
     
     

    작품명 : 대한국인 안중근

    제작연도 : 2015년 11월 11일

    작가명 : 손인환

     
     
     
     

    아! 님이시여

    안중근 의사 서거 105주년에 즈음에 님을 추모하며 김봉학 작사/작곡

     

    1. 산천도 놀랐던 그날의 기개 지금도 귓가에 들릴 듯한데
    아 무심한 세월만 흘러 백 년 하고도 다섯 해
    대한국인 쓰고 찍은 손도장 아직도 온기가 남은듯한데
    앞산에 진달래 피기도 전에 스러져간 님이시여
    그날 외치시던 대한의 독립 그렇게 갈구하던 동양 평화
    이제 우리가 이어받아서 찬란히 꽃 피우리오
    하느님 도마를 어여삐 여겨 하늘에 올리어 별 되게 하사
    행여나 우리가 갈길 잃으면 반짝이게 하소서


    2. 품었던 큰 꿈도 못 펼쳐보고 바라던 소망도 못 보신 채로
    아 서럽다 푸른 청춘 서른두 살 짧은 생애
    대한국인 손도장 볼 때마다 가슴을 저미는 님 향한 설움
    온 산에 진달래 붉게 피었오 사모하는 님이시여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 세계가 감탄하는 놀라운 번영
    님의 뜻이여 님의 덕이요 영원히 잊지 않으리오
    하느님 도마를 귀하게 쓰셔 목청 큰 천둥이 되게 하시어
    행여나 우리가 딴 길로 가면 호통치게 하소서

     
     
     
     

    안중근 의사 일대기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는 우리 겨레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시며, 민족정기의 표상이시다.
    1879년 9월 2일 순흥을 본관으로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친 안태훈(安泰勳)과 모친 조성녀(趙姓女, 마리아)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시었으며,

    7세 때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사하여 조부께서 경영하시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사서삼경에 통달하고 무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시어

    일찍이 문무를 겸한 소년으로 근동에 명성을 떨치셨다.

    16세 때인 1894년 동학을 빙자한 무리들의 소요가 일어나자 부친을 도와

    신천 의려군(信川 義旅軍)의 선봉장으로 이들을 물리쳤다.

    이때에 김홍섭의 따님인 김아려(金亞麗) 규수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19세에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홍석구) 신부를 만나 천주교에 입문하여

    세례명 ‘도마(Thomas)’를 얻었고, 서구 문명의 신지식을 배웠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 되자 안의사는 국권회복을 위해 진남포로 옮기시어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구국영재 양성에 진력하시었다.

    그러나 일본이 1907년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철도를 빼앗고 경찰권을 박탈하는 등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자

    안의사는 학교 교육으로 ‘백년대계는 가능하되 당장 나라를 구할 수는 없다’하고

    해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이때 안의사 나이는 29세였다.

    러시아 땅 연해주(沿海州)에 도착한 안의사는 이곳에서 의군을 편성하여

    일본군과 두만강 일대에서 십여 차례 치열한 전투를 감행,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09년 2월 안의사는 러시아 연추(煙秋, 러시아 연해주에 있던 한인 마을) ‘카리마을’에서

    11명의 결사 동지를 규합「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고,

    왼쪽 무명지(無名指, 넷째 손가락)를 잘라 그 선혈로 대한독립을 쓰고 독립투쟁을 맹세하였다.

    마침내 안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조국 침탈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을 북만주 하얼빈(哈爾濱, Harbin) 역두에서 포살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의사는 재판 과정에서 의거의 당위성과 이등박문의 죄상 15가지를 밝히고

    ‘나는 대한의군 중장으로 한국 침탈과 동양 평화를 파괴한 적의 괴수를 처단한 것’이라 했다.

    한편 안의사는 뤼순(旅順, 여순) 옥중에서도 나라의 안위(安危)를 걱정하시며

    자서전인「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와 미완의「동양 평화론」을 집필하시는 동안

    일제는 국법을 무시하고 안의사를 사형집행 함으로써

    1910년 3월 26일 32세의 일기로 순국(殉國)하시었다.

    의사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조국을 위한 위국헌신의 숭고한 정신과

    불멸의 평화사상을 우리 후손에게 남기셨다.

    민족정기의 화신이며, 장군이시며, 교육가이며, 사상가이신 안중근 의사의 업적은

    우리 겨레가 존재하는 한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다.
    정부는 안의사의 업적을 기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국회박물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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