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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초 김부용 시비(雲楚 金芙蓉 詩碑)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2. 4. 16. 20:10

    운초 김부용 시비(雲楚 金芙蓉 詩碑)

     

    芙蓉堂(부용당) - 부용당을 노래함

    蓮花蓮葉覆紅欄(연화연엽복홍란) 연꽃 연잎은 붉은 난간 뒤덮고
    綺閣依然泛木蘭(기각의연범목란) 단청 좋은 정자에 놀잇배 떠있네
    潑潑游魚偏戱劇(발발유어편희극) 펄펄 뛰는 고기는 연못이 놀이마당
    有時跳上錄荷盤(유시도상녹하반) 때때로 연잎 위로 솟구친다네
    朝起芙蓉宿雨滋(조기부용숙우자) 새벽의 부용당은 밤비에 함빡 젖고
    乍晴高館燕差池(사청고관연차지) 비 갠 높은 집엔 제비가 오락가락
    灑落珠璣千萬顆(쇄락주기천만과) 맑디맑은 이슬방울 구름인양 천만 알맹이
    徵風傾瀉碧琉瑀(징풍경사벽류우) 산들바람 불 때마다 유리알로 떨어지네
    淸歌一曲海天賖(청가일곡해천사) 맑은 노래 한곡 불러 하늘가에 닿는 듯
    十二紅爛泛月華(십이홍란범월화) 열두 난간 붉어 있고 달빛은 출렁인다
    雲母屛頭銀燭下(운모병두은촉하) 운모병풍 퍼져 있는 은촛대 아래에선
    佳人步步出蓮花(가인보보출연화) 미인이 사뿐사뿐 연꽃 인양 나타나네

     

    哭淵泉老爺(곡연천노야) - 연천 낭군을 곡함
    風流氣槪湖山主(풍류기개호산주) 풍류 있고 기개 높아 충청지방 으뜸이요
    經術文章宰相材(경술문장재상재) 경술 깊고 문장 빛나 재상의 재질이네
    十五年來今日淚(십오년래금일루) 15년을 함께 살다 지금에 눈물 지니
    峨洋一斷復誰裁(아양일단부수재) 갈라진 산과 바다 그 뉘가 다시 맺나.

     

     
     
     

    기생 여류시인 김부용(金芙蓉)

     

    김부용(金芙蓉)의 호는 운초(雲楚),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예술인이다.

    평안남도 성천(成川)에서 태어나 성천(成川)의 관기(官妓)가 되었다가,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을 만나 첩실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기녀가 되어 소실(小室)로 생애를 마감한 탓인지 생몰년조차 정확하지 않다.

    기녀 김부용(金芙蓉)이 관료 김이양(金履陽)의 첩실이 된 것은 신묘년(1831)이다.

    이때 운초(雲楚)는 20대였고, 김이양(金履陽)은 77세였다.

    김부용(金芙蓉)의 시집 ‘운초기완(雲楚奇玩)’ 말미에

    “지난 신묘년에, 나는 칠십칠 세이셨던 연천 노인의 소실이 되었다”라고 회고하였다.

    김이양(金履陽)의 졸년이 1845년임을 감안할 때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으로 산 기간은 14년 정도 되고,

    부실(副室)이 되기 전 성천(成川)의 기녀 신분일 때부터의 기간까지 감안하면 대략 20년의 인연이다.

    운초(雲楚)는 성천(成川)의 관기였을 때, 김이양(金履陽)을 대면하였다.

    김이양(金履陽)은 57세 때인 1811년 12월, 홍경래(洪景來) 난의 진압을 위해 함경감사에

    부임하였다가 1815년까지 서북지방에 머물렀는데, 이때 운초(雲楚)를 알게 되었다.

    김이양(金履陽)은 홍성 사람으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후손이다.

    김상용(金尙容)→광현(光炫)→수빈(壽賓)→성익(盛益)→시술(時述)→

    헌행(憲行)→이양(履陽)으로 이어지는 가계이다.

    김이양(金履陽)이 1843년 과거에 급제한 지 예순 돌이 되는 회방년(回榜年)을 맞아

    충청도 홍성·결성·천안 일대를 성묘할 때 부인의 예로써 행차에 함께하였다.

    1832년 2월. 운초(雲楚)는 김이양(金履陽)을 따라 성천(成川)에서 한양으로 이주해 왔다.

    남편과 함께 한강가의 별장 일벽정에 머물며 승경(勝景)을 유람하고,

    남편 벗들의 각종 연희에 참여하여 시·그림·음악·춤 등의 예술가로 활동하였다.

    한양 최고의 경화사족(京華士族)들과 여유와 자적의 문화 활동을 유감없이 만끽하였다.

    이때 함께한 여성 예술인이 경혜(景蕙)·경산(瓊山)·금원(錦園)인데,

    운초(雲楚)처럼 기녀에서 소실이 된 예술인들이다.

    운초(雲楚)는 이 소실 그룹의 친구들과 19세기 여성 예술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운초(雲楚)·경산(瓊山)·금원(錦園)·경춘(瓊春)·죽서(竹西) 등 다섯 명은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라는 시 동아리를 결성하여 문학의 창작과 감상, 향유 활동을 주도하고

    예술 문화계의 선두그룹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시대 여성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여성 동료와 그룹’이라는 면에서 주목된다.

    알려진 김운초(金雲楚)의 시는 300여 수로, 시집 ‘운초기완(雲楚奇玩)’,

    ‘운초당시고(雲楚堂詩稿)’, ‘운초시(雲楚詩)’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사길 30 (광덕리) 대한불교조계종 광덕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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