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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서울 선잠단지(先蠶壇址)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25. 21:11
先蠶壇址(선잠단지)
선잠제(先蠶祭)에서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모습
모형으로 연출된 장면은 선잠제에서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정1품 초헌관이 자리로 나오면 등가(登歌)에서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고 문무(文舞)가 춤을 춘다.
초헌관이 술을 올리고 무릎을 꿇고 앉으면 대축이 축문을 읽는다.
축문을 다 읽고 나면 초헌관이 자리로 돌아온다.
이후 문무(文舞)가 물러가고 문무가 나와 춤을 추며 헌가(軒歌)에서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한다.
3월 선잠제에서 제사를 지내다.
선잠제는 늦봄 음력 3월의 상서로운 뱀날(吉巳)에 지내는데
음력 3월은 뽕잎이 나기 시작하므로 잠월(蠶月)이라고도 한다.
관상감(觀象監)에서 날짜를 정하면 예조(禮曹)에서 의례 준비를 하였다.
선잠제를 주관하는 관리(官吏)들은 5일 전부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제사를 준비하였다.
절차별 음악과 무용도 준비하고 규범과 법칙에 맞추어
희생(犧牲), 폐백(幣帛), 음식, 제기 등을 설치하였다.
선잠제는 의례 속에 음악(樂), 노래(歌), 무용(舞),
그리고 음식이 어우러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1475년 ‘국조오례의’에 수록된 선잠단과 선잠제에 대한 기록
1930년대 추정 선잠단지와 주변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2016년 선잠단지 발굴 전경
2020년 선잠단지 재현 전경
서울 선잠단지 종합 안내
선잠단의 유래와 연혁
1400년(정종 2) 조선왕조 최초 선잠제 시행(장소 : 개경)
1401년(태종 1) 선농과 선잠 악장 정비 논의
1411년(태종 11) 선잠 폐백제도 상정하고 희생으로 돼지에 양도 더함
1414년(태종 14) 예조에서 선잠단의 제도와 규모를 확인함
1430년(세종 12) 태종 후반기에 수정된 선잠단 체제를 확인하고 정비함
1475년(성종 6) 국조오례의에 선잠제를 정비하여 수록
1797년(정조 21) 선잠단 동쪽 계단의 칠을 보강함
1887년(고종 24) 선잠단을 살피고 홍살문 담장 계단이 그대로임을 확인
1908년(융희 2) 신위가 사직단(社稷壇)으로 옮겨지고 선잠단지가 국유지로 이송됨
1939년 고적 제117호로 지정되면서 일부를 보호구역으로 지정
1963년 사적 제83호로 지정
사적, 서울 선잠단지(先蠶壇址)
선잠단은 누에를 처음 치기 시작했다는 서릉씨(西陵氏)를
양잠(養蠶)의 신으로 받들어 국가의례 선잠제를 지낸 곳이다.
조선의 선잠단은 1414년부터 1430년 사이에 새롭게 마련되었다.
1475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선잠단의 크기는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이며 4방향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다.
제단을 둘러싼 상단과 하단 담장의 둘레는 각각 25보이다.
선잠제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가운데 중사(中祀)로서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고 누에치기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우리나라의 선잠제는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꾸준히 시행되었다.
또한 궁궐 후원에서는 왕비가 뽕잎을 따며 양잠의 모범을 보이는 친잠례(親蠶禮)가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부터 시행된 선잠제는 1908년(융희 3) 일제가 조선의 국가제사를 축소하고
선잠단의 신위를 사직단에서 배향하게 하면서 중단되었다.
선잠단지도 국유지를 거쳐 사유지로 팔렸다가
해방 후 도로 신설로 인해 축소된 상태로 정비되었다.
2016년 선잠단지 복원사업을 위한 유적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선잠단 제단의 위치와 유구(遺構)를 확인하였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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