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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차전놀이(동채싸움)
    일상생활속에서/작품속으로 2022. 5. 3. 19:07

    안동 차전놀이

     

    이 조형물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24호인 안동 차전놀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안동 차전놀이는 일명 동채싸움이라고도 하며 후삼국(930년) 때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안동(당시 고창)에서 병산전투를 할 때

    삼태사(김선평, 권행, 장정필)가 왕건을 도와 승리를 함으로써

    후삼국 통일의 초석이 된 것을 기념하여 동군과 서군으로 편을 갈라하는 놀이로

    지금까지 천여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세계 유일무이한 상무정신이 깃든 고유 민속놀이다.

    그 당시 병산전투지가 바로 우측 진모래에서부터 북서 방면 1km 정도이므로

    그 근원지를 찾아 이곳에 조형물을 세우다.

     

    경상북도 안동시 상아동 502-1 월영교 공영주차장 內

     
     
     
     

    차전놀이 공식 명칭

     

    원래 놀이 도구가 큰 지게 꼴로 생겼으므로 이 놀이는 ‘동채싸움’, ‘동태 싸움’이라고 불러왔다.
    우리나라 강원도 춘천ㆍ가평 등 곳곳에도 동채형 놀이가 허다하였으나

    그중에서도 안동의 동채놀이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전쟁 승리와 연관된 민속놀이는 안동차전놀이가

    유일무이한 상무정신이 깃든 놀이로 인정되었다.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동채의 대표적 이름인 차전놀이로 이름을 불리게 되었다.

    안동차전놀이 중 지게형 본 동채싸움(정동채싸움)은 안동 읍내에서 대규모 싸움으로 행해져 왔으며

    째기 동채싸움(X자형 동채싸움)은 읍ㆍ면부나 안동 읍내 동네별로 행해왔다.

     

    동채의 어원은

    1. 동채(胴寨) : 큰 덩어리의 움직이는 놀이 형상

    2. 동채(棟寨) : 큰 기둥이 주체가 된 움직임의 놀이 형상

    3. 동채(動寨) : 체를 움직이며 놀이하는 형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차전의 유래

     

    안동 차전놀이(동채싸움)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기원 1천여 년 전 후삼국시대 때

    고려 왕건과 백제 견훤이 안동에서 전추를 치룬 후부터 시작된 놀이다.》라고 기록된 것을 비롯,

    『大東韻府群玉, 三國遺事卷二, 東國史略, 東國通鑑, 東史綱目, 東史會綱,

    東史纂要, 麗史提綱, 甁山戰鬪, 三太師公實蹟, 永嘉誌』등 향토 사기,

    각종 기록에 의하면 몇가지 차전에 관련된 기록이 있다.

     

     

    첫 번째 이야기

    후백제 견훤이 삼국통일의 야망으로 신라를 멸하고 여세를 몰아 고창(안동)에 진격했다.

    그때 수세에 몰렸던 고려 왕건은 당시 성주(城主) 김선평(金宣平) 형관(形官) 권행(權幸) 장길(張吉) 등

    세 사람의 도움으로 병산(안동) 싸움에서 승리했다.

    왕건은 이 세사람을 개국공신으로 감한 벽상공신의 호를 주고 정일품의 벼슬인 태사에 봉하였다.

    이 분들이 3성(안동김, 안동권, 안동장)의 시조이다.

    그 후 지역주민들은 왕건과 견훤의 싸움을 연상시켜 “지게”처럼 생긴 동채 위에

    그 지역에서 가장 덕망 있는 장정을 지휘자(대장)로 태워 동채놀이를 해왔다.

     

     

    두 번째 이야기

    대구 팔공산에서부터 견훤에게 밀린 왕건은 고창(안동) 합전다리에서 밀릴 때 3태사가

    병산에 진을 치게 하고 이 마을 안중구 노파에게 저수봉 기슭에 있는 견훤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견훤이 개천에 목욕을 하고 나면 원기가 치솟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견훤은 지렁이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낙동강 개천에 소금을 넣게 한 후 안노파에게 독한 고삼주를 빚게 하여 견훤군에게 먹였다.

    그 후 왕건군이 함성을 치며 기습공격을 하자 적은 삽시간에 궤멸되면서 적장 가운데

    김악은 사로잡혀 참수되고 견훤은 혼비백산하여 모래골을 지나 부여 방면으로 도망가게 했다.

    이 회전을 조물성대첩이라고 한다.

    이후 지역주민들은 소금등짐장수 지게에 견훤과 왕건을 태워 밀어 붙이고

    도망가는 모습의 흉내를 내면서 놀이하던 것이 차전놀이다.

    이때 외치던 구호가 월사덜사(모래땅에 쓰러진 시체를 타 넘고 도망갔다)라고 외치고 있다.

    삼태사 후손들은 안노파의 공을 기리기 위해 안묘당이라는 사당에 백마를 그린 벽화를 그려놓고

    고전을 상징하며 춘추항례에 태사의 퇴주로 묘직을 시켜 묘사를 지내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자태와 용모가 단정한 1녀를 두고 살았는데

    이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찾아와 교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바늘에 긴 실을 꿰어 그 옷에 찔러두라’고 하였다.

    그다음 날이 밝자 그 실을 찾아가 보니 바늘이 북쪽 담 아래 큰 지렁이의 허리에 찔려 있었다.

    그 후 임신하여 한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에 스스로 견훤이라고 일컬었다.

    왕건은 견훤이가 지렁이 화신임을 알고 많은 소금을

    견훤이 목욕하는 낙동강 늪에 넣어 염수로 만들었다.

    견훤은 그 물에 목욕하러 들어갔다가 몸을 움츠리자 주민들이 팔짱을 끼고 밀어붙였다.

    이에 견훤은 허둥지둥 도망치며 참패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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