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서울 보화각(葆華閣)의 운미난첩(芸楣蘭帖)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5. 4. 20:10

    등록문화재, 서울 보화각(葆華閣)

     

    면적 : 1동(274㎡), 등록문화재 등록일 : 2019. 12. 30

    서울 보화각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선생이 우리나라 전통미술품 등

    유물 보존 및 활용을 위해 1938년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

    건축가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 설계한 모더니즘(modernism) 양식의 건축물이다.

    일제강점기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다수의 문화유산이

    멸실 위기 속에서도 이를 보전해온 중요한 장소로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한편, 보화각은 이번 전시(寶華修補殿, 보화수보전)를 마지막으로 보수·정비에 들어간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02-11 (성북동) 간송미술관

     
     
     
     
     

    간송의 보물을 다시 만나다. 寶華修補(보화수보)

     

    전시기간 : 2022년 4월 16일 ~ 2022년 6월 5일

    전시장소 : 간송미술관

    주관 : 간송미술문화재단

     

    ※ 이번 전시 제목에서 '보화(寶華)'는 보배로운 정화를 뜻하며,

    '수보(修補)'는 낡은 것을 고치고 덜 갖춘 곳을 기우는 행위를 의미한다.

     

     
     
     

    澗松文化財의 修理와 保存

    寶華修補殿(보화수보전)

     
     
     
     

    운미난첩(芸楣蘭帖)

     

    민영익, 지본수묵(紙本水墨), 각 30.7cm × 58.2cm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학예를 계승한 문인답게 묵란화에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그의 묵란화는 ‘운미란(芸楣蘭)’이라 불리며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운미난첩(芸楣蘭帖)은 무려 72종의 다양한 양태의 춘란과 혜란을 그려 성첩한 묵란첩이다.

    표지 묵서로 보아 1896년 9월 15일에 중국 상해(上海)에 있던 민영익의 별서인 천심죽재(千尋竹齋)에서

    제작하여 사촌 형인 금래(琴來) 민영소(閔泳韶, 1852~1917)에게 증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상해 망명 초기 작품답게 전체적인 형식과 필치가 만 년작과는 차이가 있다.

    전반적으로 전통적인 묵란화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일면 추사 묵란 화풍의 자취도 엿보인다.

    그러나 삼전(三轉)과 비수(肥瘦)의 변화가 절제된 난엽의 묘사와 호쾌하게 쳐나간 난엽을

    화면 밖까지 연장하여 공간을 확대하고 군란의 일부분을 옮겨놓은 듯한 양태 등에서는

    운미란의 독특한 개성이 묻어난다.

    사촌 형의 부탁을 받고 자신의 난치는 법을 총괄하여 교본(敎本)과 같은 화첩으로 꾸민 듯하다.

     

     
     
     

    閔氏千尋竹主人寫蘭(민씨천심죽주인사란) 芸楣自題(운미자제)

    민씨 천심죽재(민영익의 당호)가 난을 그리다. 운미가 직접 쓰다.

     

    민영익(閔泳翊)

     

    민영익(1860년~1914년, 중국 상하이)은 조선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우홍(遇鴻), 자상(子相).

    호는 운미(芸楣), 원정(園丁), 천심죽재(千尋竹齋) 등이 있다.

    아버지는 민태호(閔台鎬),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

    □ 정치인 민영익

    처음에는 온건 개화파 정치인이었다가 갑신정변 전후로는

    조선말기 민씨 외척 정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경기도 출신이며 명성황후의 친정 일족이었다. ​

    중도 개화파의 후원자였으며, 1883년 보부상을 단속하는 혜상공국(惠商公局) 총판이 되기도 했다.

    1884년 10월에 친군영(親軍營)이 실시되면서 우영사(右營使)를 역임했다.

    친일적 급진 개화파와 갈등이 생겨 1884년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갑신정변을 감행할 때

    가장 먼저 자객의 기습으로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치료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회생하였다.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서광범 등을 암살하기 위하여 자객을 밀파한 일도 있었다.​

    그 뒤 1885년 군국기무아문 협판, 병조판서, 한성판윤,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1886년 조선 정부의 친러 거청(親露拒淸) 정책에 반대하여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이를 밀보했다가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여 홍콩으로 망명했다.​

    뒤에 귀국하여 1889년 판의금부사, 1894년 선혜청 당상이 되었다.

    대한제국이 성립하자 1898년 의정부 찬정이 되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성립하자

    고종 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홍콩으로 망명,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들었음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그는 상하이에서 체류하다 1914년 죽었다.

    □ 예술인 민영익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글씨를 배운 부친 민태호(閔台鎬)와 숙부 민규호(閔奎鎬)의 가학을 이어

    15세 무렵 서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1878년 왕실 외척으로 정계에 입문했던 초기에 김정희 제자인

    허련(許鍊)을 자택에 머물게 하는 등 서화가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추사파와의 직간접인 인연은 개화파와의 대립으로 상해에 정착했을 때,

    민영익이 오창석(吳昌碩), 포화(蒲華), 서친주(徐親周), 고옹(高邕) 등

    상해 서화가와 교유하며 문인화가로 활동할 수 있는 주요 기반이 되었다.

    민영익은 1904년 상해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오창석이 1895년 8월 새겨준

    ‘천심죽재(千尋竹齋)’라는 인장의 변관에 “운미 선생이 기거하는 곳을 천심죽재라 하였다”라는

    구절과 1895년 이후의 작품부터 오창석의 인장이나 포화의 제시가 다수 포함되고 있어

    1895년 무렵 천심죽재에 정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민영익은 상해 서화가들과 시서화로 교유하며 독자적인 운미란(芸楣蘭)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비수(肥瘦)와 삼전(三轉)이 없는 난엽(蘭葉)이 곧으면서

    힘 있게 곡선을 그리다 끝이 뭉툭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화풍은 이하응(李昰應)의 석파란(石坡蘭)과 함께 조선미술전람회를 포함한

    근대 한국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1898년과 1909년 민영익을 방문해 상해의 서화가들과 직접 교유한

    서병오(徐丙五)가 운미란과 포화의 묵죽화풍을 수용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서동균(徐東均), 김용진(金容鎭), 배효원(裵孝源), 이경배(李慶培) 등이 운미란을 즐겨 그렸으며,

    김규진(金圭鎭) 제자인 이병직(李秉直)과 이응노(李應魯)도 일부 영향을 받았다.

    또한 민영익은 포화의 영향을 받아 죽엽(竹葉)이 아래로 처지는

    수하식(垂下式)의 우죽(雨竹)과 노죽(露竹)을 그렸는데, 이는 노근란(露根蘭)과 함께

    망명 생활을 하는 자신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대변한 것이다.

    특히 민영익의 운미란은 근대 한국 화단에서 석파란과 함께 널리 유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까지도 지속되고 있어 현대 사군자의 양식적 연원이나 계보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김규진, 서병오 등 한국 서화가들이 상해를 방문했을 때 오창석, 포화 등

    상해 화가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양국의 회화 교류에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지닌다.

    현전 작품에는 「묵란」(1904, 간송미술관)과 「노근묵란(露根墨蘭)」(삼성미술관 리움)이

    대표적이며 다수의 사군자가 전하고 있다.

     

     

     
     

    歲丙申秋九月十有五日(세병신추구월십유오일)

    閔氏千尋竹齋學蘭(민씨천심죽재학란)

    芸楣自題呈(운미자제정)

    琴來從伯大人雅鑒(금래종백대인아감)

    1896년(병신년) 가을 9월 15일, 천심죽재가 난을 배웠습니다.

    운미가 직접 써서 드립니다. 금래 사촌형님께서 살펴 주십시오.

     

    ※ 금래(琴來)는 민영소(閔泳韶)의 호,

    민영소는 민영익의 숙부인 민규호(1836~1878)의 양자로 민영소는 민영익의 사촌 형.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