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헌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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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어구(英陵 御溝)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2. 3. 7. 22:10
영릉 어구(英陵 御溝) 어구는 능역의 조성물로 능이나 궁궐 안에서 흘러나오는 개천(開川)이다. 이곳 합수어구(合水御溝)는 영릉(英陵,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 능침(陵寢) 주변에 위치한 동측 어구와 서측 어구가 만나 물이 흐르는 곳이다. 2018년 문화재 발굴조사 중 문석인(文石人), 비석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능역 조성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문석인 제작과정 중 남은 것을 어구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어구 복원정비에 활용되어 찾아볼 수 있다. ※ 문석인(文石人) : 관복을 입고 능 주인을 보좌하는 인물상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50 (왕대리)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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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구 영릉 석물(舊 英陵 石物)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16. 19:12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구 영릉 석물(舊 英陵 石物) 영릉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과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를 모신 왕릉이다. 처음에는 서울 서초구에 있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논의가 있어 예종 원년(1469)에 현재 영릉이 있는 여주로 옮겼다. 이때 능을 치장했던 석물을 운반하기 어려워 가져가지 않고 땅에 묻었는데, 1970년대에 발굴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석양, 석마, 망주석, 장명등, 석인상, 혼유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 현재 남아있는 석물은 1974년에 이곳 세종대왕 기념사업회로 옮겨왔다. 품목과 수량이 처음과 다르고 일부 부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구 영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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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보상절 권6, 9, 13, 19(釋譜詳節 卷六, 九, 十三, 十九) - 보물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0. 9. 22:10
석보상절 권 6, 9, 13, 19(釋譜詳節 卷六, 九, 十三, 十九) - 보물 ‘석보상절’은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권 6,9,13,19는 초간본으로 갑인자 활자로 찍은 것이다. 책머리에 『교정(校正)』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고, 이 책 속에 잘못 활자가 찍힌 것이나 또는 초고에서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 것을 교정하여 난외(활자판 바깥부분)에 정오(正誤)를 표시한 것이 보여 문자 그대로 교정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국립중앙도서관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출처 : 문화재청 www.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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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현비암(靑松 賢妃岩)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21. 6. 23. 04:16
용전천(龍纏川) 용전천은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중기리 구암산(807m) 계곡에서 발원하여 청송읍을 서류(西流)하면서 영양군의 반변천(半邊川)과 합류하여 안동시 임하호(臨河湖)에 유입된 후 안동호(安東湖)와 합류한 뒤 낙동강(洛東江)의 수계(水系)를 이룬다. 월막교(月幕橋)에서 본 현비암(좌측) 현비암(賢妃岩)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전설에 따르면 이곳 현비암 아래 용전천에는 오랜 세월 공덕을 쌓은 용이 하늘로 치솟아 오를 때에 이른 새벽 빨래하러 왔던 한 아낙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 고함을 지르는 대신 용이 하늘로 잘 올라가도록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와 이곳에서 사람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이에 처음 이 바위는 마치 용이 날아가는 모양이라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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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지곡 권상(月印千江之曲 卷上) - 국보 제320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12. 17. 19:53
웛힌쳔강지콕 - 부처의 자비가 달빛처럼 중생을 비춘다. 월인천강지곡 권상(月印千江之曲 卷上) - 국보 제320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世宗)이 그의 아내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공덕을 빌기 위하여 직접 지은 찬불가(讚佛歌)이다. 훈민정음 창제이후 가장 빠른 시기에 짓고 활자로 간행한 점에서 한글 창제 후 초기의 국어학 연구와 출판인쇄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비록 3분의 1 정도만 남은 零本이나 이 책이 갖는 국어학적, 내지 출판 인쇄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는 점에서 국보로 승격할 가치가 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검색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heritage.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