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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장인(丈人), 심온(沈溫)선생 묘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4. 3. 15. 05:00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장인(丈人), 심온(沈溫)선생 묘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심온(沈溫)의 묘로,

    1979년 9월 3일 경기도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심온(沈溫)선생은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옥(仲玉). 아버지는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이다.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로 영의정에 오른 심온(?~1418)의 묘이다.

     

     

    심온은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으며, 조선왕조 개국 후 의랑(議郞)·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1404년(태종 4) 상호군 겸 판통례문사(上護軍兼判通禮門事)가 되었고,

     

     

    이후 좌부대언(左副代言)·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등을 역임했다.

     

     

    1408년 딸이 충녕군(忠寧君 : 나중에 세종)의 비가 되었다.

     

     

    1411년 풍해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414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후 호조판서·판한성부윤·좌군도총제·이조판서를 역임했다.

     

     

    태종의 선위(禪位)로 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다.

     

     

     

    1418년(태종 18) 사은사로 중국 명나라에 갔는데,

     

     

    이때 병조판서 강상인(姜尙仁)과 그의 동생인 도총제(都摠制) 심정이

     

     

    금위(禁衛)의 군사를 분속시키면서 상왕인 태종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태종은 분노하여 이들과 함게 병조판서 박습(朴習) 등을 참수하게 했다.

     

     

    심온은 당시 명나라에 가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었으나

     

     

    주모자로 지목되어 귀국하는 길에 옥사가 일어나 의주(義州)에서 피체(被逮)되어

     

     

    수원으로 압송된 후 사사(賜死)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왕비의 아버지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朴誾:1479~1504)의 무고로 밝혀져

     

     

    후에 세종은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  

    심온 선생의 묘역은 장대석을 이용해 상하 2단으로 구분하였다.

     

     

    상단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묘비와 상석이 배열되어 있으며,

     

     

    하단에는 장명등과 그 좌우에 문석인 1쌍이 배치되었다.

     

     

    묘비의 비문은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 이용이 썼다.

     

     

    묘역에서 약 100m 떨어진 마을 입구의 신도비는 9대손 심하단이 찬하고,

     

     

    서명균(徐命均:1680~1745)이 글을 쓰고, 심과육이 전액(篆額)을 써서 1737년(영조 13)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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