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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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양주순교성지(天主敎 楊州殉敎聖地)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20. 6. 14. 04:56
십자가의 길 봉헌서 양주 순교성지의 성역화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십자가의 길'을 설치했습니다. 성지는 무엇보다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십자가의 길 기도가 순교자들과 함께 바치기에 가장 좋은 기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송렬 요한 형제의 묵상을 담아 우선 작게 제작하여 설치했습니다. 본래 크기의 십자가들은 현재 제작을 진행하고 있고, 시기에 맞춰 설치할 예정입니다. 본 십자가의 길은 봉헌자 3,000명의 이름으로 제작하려고 합니다. 3,000명의 이름이 십자가의 길 아래 기둥에 영구 보존할 것입니다. 봉헌금은 한 이름당 10만 원 이상이며, 3천 명 도달 시 종료됩니다. 천주교 의정부교구 양주순교성지 양주 순교성지(楊州殉敎聖地)의 발견과 성역화 천주교 의정부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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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관아지(楊州官衙址) - 경기도 기념물 제167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6. 13. 04:14
측우대 내아영역(內衙領域) 내아영역은 지방수령이었던 양주목사의 가족들이 거처하였던 내아와 행랑채, 내아 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아건축 구조상 내아영역은 동헌의 서편에 위치하며, 내동헌 또는 서헌이라고도 불린다. 튼 "ㅁ"자 모양의 내아에서 양주목사와 그 가족들이 거처하였고, 양주목사 및 그 가족들이 내아와 동헌 사이의 협문인 중렴성문을 통해 내아와 동헌을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아 아래쪽에는 행랑채가 있어 주로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기거하거나 창고로 이용되었다. 또한 외부로의 출입을 위해 내아 삼문을 두었다. 내아영역은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인들의 주내면사무소로 사용되었고, 내야 전면부 쪽은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당시 죄인이나 포로를 가두고 고문하는 장소로 이용되는 등 후대에 이르러 건물들이 망실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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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 -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국내 나들이/공연장(公演場) 2020. 6. 7. 21:27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 -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의 근원은 서울 중심의 경기지방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분파로서, 녹번(碌磻)·아현(阿峴) 등지의 본산대(本山臺)와 같다. 약 200년 전부터 해마다 사월초파일과 단오에 한양의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해 놀았으나 그들이 지방공연 관계로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자 양주골의 신명이 많은 사람들이 탈을 만들고 연희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본(本)산대가 전해지지 않는 오늘날, 이 놀이는 경기지방의 대표적 탈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이 놀이는 사월초파일과 단오·추석에 주로 연희되고, 크고 작은 명절 외에도 가뭄 때 기우제(祈雨祭) 행사로 연희되었다. 격식대로 하면 놀이 전에 고사를 지내고 제물을 음복(飮福)한 뒤 놀이를 시작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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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향교(楊州鄕校)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6. 6. 22:31
양주향교(楊州鄕校)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호 향교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 교육기관으로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양민(良民) 이상이면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시(詩)나 문장(文章)을 짓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배우는 경학(經學)이 주요 교육내용이었다. 또한 향교는 교육뿐만 아니라 선성선현(先聖先賢)에게 제사하는 곳이기도 하다. 양주향교는 조선 태종 원년(1401)에 건립된 후 많은 유학자를 양성 배출하던 지방의 교육기관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소되었고, 1610년에 재건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전쟁 후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성전을 먼저 복원하고, 1984년에 명륜당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양주향교에는 고대 중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