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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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정지용 문학관(沃川 鄭芝溶 文學館)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22. 8. 9. 04:03
엽서에 쓴 글 - 정지용 詩 나비가 한 마리 날러 들어온 양 하고 이 종잇장에 불빛을 돌려대 보시압. 제대로 한동안 파다거리 오리다. -대수롭지도 않은 산목숨과도 같이. 그러나 당신의 열적은 오라범 하나가 먼데 가까운데 가운데 불을 헤이며 에이며 찬비에 함추름 취적시고 왔오. -스럽지도 않은 이야기와도 같이. 누나, 검은 이 밤이 다 회도록 참한 뮤-쓰처럼 쥬무시압. 해발 이천 피이트 산봉우리 우에서 이제 바람이 나려 옵니다. 정지용 시인 - 고향에서 문학을 노래하다 호수 1 얼골 하나 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 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꿈엔들 잊힐리야 시인 정지용 상(詩人 鄭芝溶 像)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군 옥천면(현 옥천읍) 하계리에서 부친 정태국(鄭泰國)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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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벽화거리(옥천읍 향수4길, 향수5길)일상생활속에서/사람사는 현장 2022. 7. 17. 04:05
향수(鄕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돗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선 자라난 내 마음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빛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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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생가(鄭芝溶 生家)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7. 10. 21:02
향수(鄕愁) 어린 '정지용 생가' 전형적인 초가집으로 두 채가 한 울타리에 있으며, 정지용(鄭芝溶, 1903~1950)은 이곳에서 17세까지 지내고 서울로 상경하여 교사 생활과 집필 활동을 하였다. 원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졌으나 1988년 정지용 시인의 납북이 정부로부터 인정받고 작품들이 해금되면서 옥천에서 결성된 지용회를 통해서 생가 복원이 논의되었으며, 1996년에 생가지에 초가집 두 채를 복원하였으며, 바로 옆에 정지용 시인의 문학세계를 전시하는 정지용문학관이, 근처에 옥천군립 지용문학공원이 신설되었다. 부엌을 제외하고 정면 2칸은 퇴칸 구조이다. 생가의 전체적인 형상은 'ㄱ‘자 집이며 마주 보이는 방향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一‘ 자형 창고가 있다. 주거용의 'ㄱ‘자 집은 부엌 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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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문학관(鄭芝溶 文學館)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21. 10. 28. 19:14
정지용문학관 정지용 시인 - 고향에서 문학을 노래하다 시인 정지용 상(詩人 鄭芝溶 像)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군 옥천면(현 옥천읍) 하계리에서 부친 정태국(鄭泰國)과 모친 정미하(鄭美河)의 장남으로 출생. 옥천보통공립학교와 휘문고보를 거처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휘문고보에 다닐 때부터 습작 활동을 시작하여 1922년 ‘풍랑몽’을 쓰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시문학, 구인회의 문학 동인파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처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 교수, 경향신문 주간, 조산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 인민군에 의해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납북되어 그해 9월 25일 사망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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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정지용일상생활속에서/사람사는 현장 2021. 10. 22. 20:03
나무 - 정지용 얼골이 바로 푸른 한울을 우러렀기에 발이 항시 검은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듯이 우로! 어느모양으로 심기어졌더뇨? 이상스런 나무 나의 몸이여! 오오 알맞은 위치(位置)! 좋은 우아래! 아담의 슬픈 유산(遺産)도 그대로 받었노라. 나의 적은 연륜(年輪)으로 이스라엘의 이천년(二千年)을 헤였노라. 나의 존재(存在)는 우주(宇宙)의 한낱 초조(焦燥)한 오점(汚點)이었도다.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어 입을 잠그듯이 이제 그리스도의 못박히신 발의 성혈(聖血)에 이마를 적시며- 오오! 신약(新約)의 태양(太陽)을 한아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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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鄕愁) 어린 '정지용 생가'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0. 21. 04:02
향수(鄕愁) 어린 '정지용 생가' 전형적인 초가집으로 두 채가 한 울타리에 있으며, 정지용(鄭芝溶, 1903~1950)은 이곳에서 17세까지 지내고 서울로 상경하여 교사 생활과 집필 활동을 하였다. 원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졌으나 1988년 정지용 시인의 납북이 정부로부터 인정받고 작품들이 해금되면서 옥천에서 결성된 지용회를 통해서 생가 복원이 논의되었으며, 1996년에 생가지에 초가집 두 채를 복원하였으며, 바로 옆에 정지용 시인의 문학세계를 전시하는 정지용문학관이, 근처에 옥천군립 지용문학공원이 신설되었다. 부엌을 제외하고 정면 2칸은 퇴칸 구조이다. 생가의 전체적인 형상은 'ㄱ‘자 집이며 마주 보이는 방향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一‘ 자형 창고가 있다. 주거용의 'ㄱ‘자 집은 부엌 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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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지용 상(詩人 鄭芝溶 像)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0. 18. 22:13
시인 정지용 상(詩人 鄭芝溶 像)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군 옥천면(현 옥천읍) 하계리에서 부친 정태국(鄭泰國)과 모친 정미하(鄭美河)의 장남으로 출생. 옥천보통공립학교와 휘문고보를 거처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휘문고보에 다닐 때부터 습작 활동을 시작하여 1922년 ‘풍랑몽’을 쓰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시문학, 구인회의 문학 동인파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처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 교수, 경향신문 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 인민군에 의해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납북되어 그해 9월 25일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