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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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지극한 효성, 지지대비(遲遲臺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6. 29. 04:19
지지대(遲遲臺) 음각자(陰刻字)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말을 탄 사람이 이 앞을 지날 때 누구나 말에서 내리라는 글을 새겨 세운 비석 (관직의 높고 낮음 없이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 비각 출입문 주변에 새겨진 낙서 一九六三年 八月 二一日 오중鉉 지지대의 옛 지명, ‘사근현(沙近峴)’ 조선 정조 이전까지 이 지역은 사근현(沙近峴)이라고 불렀다. 『해동지도』에도 사근현으로 나와 있다. 한편 『팔도 군현지도』에서는 그 자리에 사근현 대신에 '미륵당(彌勒堂)'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미륵당은 지지대 고개 정상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하여 정조 때 '미륵현'으로 부르다가 이후에 다시 '지지현(遲遲峴)'으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정조의 지극한 효성, 지지대비(遲遲臺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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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비(遲遲臺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20. 7. 15. 04:09
지지대비(遲遲臺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지지대비는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1807년(순조 7) 화성 어사 신현(申絢)의 건의로 세워졌다. 정조대왕은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 현재 화성시 융릉)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무덤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언제나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무덤을 뒤돌아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기 때문에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 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 지(遲)’자 두 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비문은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윤사국(尹篩國)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유수 홍명호(洪明浩)가 전액을 썼다. 지지대고개의 유래 정조는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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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遲遲臺)와 지지대비(遲遲臺碑)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16. 8. 26. 05:39
지지대(遲遲臺)와 지지대비(遲遲臺碑) 지지대비는 조선(朝鮮) 정조(正祖)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순조 7년(1807)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워진 비이다. 조선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 능인 화성의 현륭원(顯隆園)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능을 뒤돌아보며 이곳을 떠나기를 아쉬워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 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자 두 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제학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윤사국(尹篩國)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유수 홍명호(洪明浩)가 전액을 썼다. 비운의 생애를 마친 아버지에..